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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 산행 분류▩/♡100대 명산

전라북도 고창군 방장산(장성갈재-양고살재) 명산 산행

전라북도 고창군 방장산(장성갈재 - 방장산 - 양고살재) 웰빙산행

◎ 산행일시 : 2014년         06월         29일         (일요일)

◎ 산행위치 : 전라북도 고창군, 정읍시, 전라남도 장성군에 걸쳐있는 산이다 

 

◎ 산행구간 : 장성갈재(1번국도) - 515m봉 - 쓰리봉(734mm) - 67m5봉 - 서대봉(675m) - 연자봉(695m)

                      봉수대(715m) - 방장산(方丈山, 743m) - 고창고개 - 억새봉(636m) - 벽오봉(방문산; 640m)

                      방장동굴 - 문암이재(문너머재) - 갈비봉(별봉, 572m) - 배넘이재 - 방장사 - 양고살재(15번국도)

 

◎ 산행거리 : 장성갈재 ~ 1.8Km ~ 쓰리봉 ~ 2.4Km ~ 봉수대 ~ 1.0Km ~ 방장산 ~ 1.1Km

                      고창고개 ~ 0.9Km ~ 억새봉 ~ 0.2Km ~ 벽오봉 ~ 1.3Km

                      배넘이재 ~ 0.4Km ~ 갈미봉 ~ 0.6Km ~ 방장사 ~ 0.7Km ~ 양고살재(15번국도)

                      도보거리   =   약 14.2Km           실제도보거리   =   약 15.5Km

 

◎ 산행인원 : 울~몽실님과 함께     ◎ 산행시간 : 06 : 40 ~ 13 : 50  (07시간 10분)      ◎ 날씨 : 아주, 맑음

 

            ◐ 호남의 삼신산으로 불리면서 추앙받고 있는 방장산 산행이란?

전북 고창과 전남 장서의 경계에 위치한 방장산은 호남정맥 내장산과 백암산 중간에서 서쪽으로 분기해서 목포까지 이어진다

영산기맥에서 가장 높이 솟은 봉우리로 조선시대까지 방등산(方等山)이라고 불리웠으나 산이 크고 넓어 모든 백성을

포용한다는 의미에서 방장산이라 부른 것으로 전해지며, 백제가요인 "방등산가(方等山歌)"가 이 산을 무대로 지여진 노래이다

 

 

***** 전라북도 고창군 백오봉(640m)에서 *****

 

저의 산행기를 읽으면서 즐겁고 행복한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혹시라도 문장이나 맞춤법이 틀린곳이 있다면 마음속에 그냥 담아 두시기 바랍니다

 

 

 

*****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방장산 산행지도 *****

 

 

 

 

 

 

 

장성갈재(276m)는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를 잇는 주요 고개로 노령(蘆嶺)이라고도 불린다

지하터널로 호남고속도로와 호남선 철도가 이곳을 지나가며, 옛말에 "갈재를 넘어야

진짜 호남"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곳을 경계로 전남과 전북의 말씨와 풍습이 달랐다고 한다

 

 

 

 

장성갈재까지가 내장산국립공원으로 속해 있고,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1번국도가 지나간다

갈재 아래로 호남고속도로가 뚫리면서 통행량은 많이 줄어 들었고, 고개 정상에는

김대중 前대통령과 김정일이 6.15정상회담을 기념해 만든 조국통일공원기념비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거란의 침입을 피해 넘어야 했고 왕조시절 전라도로 유배되는 이들의 한숨과 탄식이 머물렀던 장성갈재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를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로 노령(蘆嶺)이라고도 한다

옛적 이곳에 갈대가 많아 불린 이름이라 하고, 노아낭자(蘆雅娘子)가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장성갈재 노령(蘆嶺)의 전설>은 조선시대가 그 시대적 배경이다~ 남도에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한 도령이 있었다

도령은 장성과 정읍의 경계선 부근의 고개에 와서 날이 져물어 주막에 묵었다

그 주막에는 노화(蘆花: 갈대 노, 꽃화)라는 딸이 있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도령은 노화의 아리따움에 빠져 주막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사흘을 머물며 노화와 정분을 쌓았고

급기야 사흘밤에는 과거에 급제하면 반드시 찾으러 오겠노라는 약속과 함께 부부의 인연을 맺고

꿈같은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른 아침에 떠나는 도령을 노화는 주먹밥을 지어서 싸주며 꼭 돌아오기를 당부했고

도령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한양으로 향했다 도령은 그해 과거에서 급제했고

정읍과는 다른 방향의 수령이 되어 부임했다 그러면서 도령은 노화와의 인연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도령은 전라감사가 되어 정읍을 지나게 되었고 고개에 이르러 그동안 잊고 있었던 노화를 떠 올렸다

주막에 멈추게 한 후에 주막을 살펴 보았지만 아무도 없는 주막이었고 퇴락해서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인근을 뒤져서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겨우 노화의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도령이 떠나간 후 노화는 한양간 도령을 기다리며

10년이 지난 후부터는 점점 몸이 야위어 가면서 병색이 돌다가 5년쯤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그녀의 묘가 고개 위 산에 있다고 했다 감사가 그녀의 묘라는 곳에 갔을 때 노화의 묘 위에는 갈대

한 송이가 피어 있었고 훗날 산 정상엔 갈대만 무성하게 되었다 그 뒤로 이 고개를 갈재(갈대고개)라 했고 노령이라 했다고 한다

 

 

 

 

전라북도 정읍사람들과 남도 사람들이 오고갈 때 꼭 넘을 수밖에 없었던 갈재는 제법 험난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람도 쉬어 넘는 고개>라고 영조 때의 문신인 이정보(李鼎輔)가 노래했다

바람도 쉬어 넘는 고개

구름이라도 쉬어 넘는 고개

산진(山陳) 수진(水陳) 해동청(海東靑) 보라매도

산진(山陳) 수진(水陳) 해동청(海東靑) 보라매도

다 쉬어 넘는 고봉 장성령 고개

그 넘어 임이 왔다 하면

(나는) 아니 한 번도 쉬어 넘어가리라

한시조 읊프면서 통일기념비를 바라보며 하루빨리 조국통일이 이루워기를 기원하며 차단기를 넘어 산정에 오른다

 

 

 

 

<시멘트도로를 따라 30m정도 오르면 우측으로 쓰리봉으로 오르는 산길이 열려 있다>

장성갈재는 동학혁명 당시 녹두 장군 전봉준이 정읍 고부에서 조병학의 탐학에 봉기 동학운동하다

외세 일본 개입으로 진이 와해되자 입암산성을 거쳐 남창계곡에서 은거하다

내장산을 거쳐 정읍 황토현(정읍시 종성리 황토리에서 김개남 장군과 부흥을 꿈꾸다

순창 쌍치면 피노리에서 김경준의 고변으로 피체(체포)되어 민족 부흥운동의 꿈을 못 이룬 한맺힌 고개이다

 

 

 

 

오늘은 시종일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따르게 된다

이 산줄기는 100대 명산이면서도 영산기맥으로

호남정맥 내장산과 백암산 사이의 안부 새재에서 분기하여 입암산을 넘어온 산줄기이다

 

 

 

 

돌무더기 흔적이 있는 헬기장을 지나고 515m봉을 넘어서면 성터 같지는 않고

집터의 흔적으로 보이는 돌담으로 여겨지는데

복원을 해놓은 군참호는 "방등산가"에 등장하는 도적들의 산성터로 추정하고 있는것 같다

 

 

 

 

육산으로 숲이 울창하고 계속해서 고도를 높이는 형국이라서

오늘처럼 바람이 없는 여름 날씨엔 조금만 올라도

숨이 차 오르고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쓰리봉 오름길은 가뜩이나 높은 습도와 함께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고스톱 한번 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이래가지고 서리~ 어디 쓰리고는 한번 할 수 있을런지~

힘들게 고흥유씨 묘역에 오르면 우측으로 있는 변산지맥 분기봉을 확인을 하지 못했다

 

 

 

 

쓰리봉(734m)은 전남 장성군과 전북 정읍시 그리고 고창군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이다

봉우리가 연달아 3개가 있다고 하여 쓰리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봉우리 정상은 암릉으로 되어 있고 이곳에서 부터 정읍시와 작별을 하고 고창군으로 접어든다

 

 

 

 

쓰리봉에서 갈라지는 변산지맥(邊山枝脈)이란 새재에서 유달산으로 이어지는 영산기맥이

장성갈재를 지나 쓰리봉(734)봉 직전에서 서북쪽으로 가지를 쳐서

전라북도 변산군 격포리의 봉화봉에서 그 맥을 서해 바다에 넘겨주는 도상거리 약 53.4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쓰리봉을 내려서니 왜 고스톱이 생각이 날까요?

쓰리고~ㅎㅎ  참 많이 했지요~^^

아마도 고스톱을 좋아한 사람이 쓰리봉이란 이름을 지었을까?

 

 

 

 

무더운 날씨에 희미한 연무속에 장성군의 백암저수지가 안개속에 묻혀 있다

오른쪽에 능선은 방장산의 주능선이며, 기온은 높고

시계는 안개속이라~ 늘 그래왔듯이 오늘도 조망의 즐거움은 그냥 접어 두어야 겠다

 

 

 

 

시선을 압도하는 큰 바위가 나타나면서 갈길 바쁜 산꾼을 붙잡는다

처음만난 염생이도 포터죤이 되어주고, 방장산 산신령은

기운이 남으셨는지 평평한 고창벌을 바라볼 수 있게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방장산은 옛부터 지리산, 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으로 불려왔으며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를 양분하는 산으로서 산세가 웅장하고

자연휴양림인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100대 명산으로 선정하였다고 한다

 

 

 

 

방장산 부근 산지는 넓고 골이 깊어 은거하기에 적당하여 산적들이 활동하기에 좋았단다

백제 멸망 이 후 유민들이 산으로 숨어 들어 도적질을 하며

살던것이 오랜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산적에 납치된 아내가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며 부른 "방등산가"가 전해왔다는 기록이 있을만큼 가슴아픈 사연을 품고 있는 산이다

 

 

 

 

특히한 것은 허균이 쓴 홍길동전의 모티브가 된 찐짜 홍길동도 이 곳 방장산 줄기에서 태어나

노령(蘆嶺)을 주무대로 활동한 산적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잡혀 국문을 당하는데 이러한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릴만큼 당시 화제가 된 인물이다

이런 홍길동이 허균에 의해 의적 홍길동으로 소설화 되기까지는 10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었다

 

 

 

 

꽃잎처럼 이어진 방장산 줄기가 앙골차게 남성미를 과시한다

시원한 풍광에 눈은 즐겁지만

앞으로 몇번의 오르내림을 반복해야 할지~ 마치 인생의 굴곡처럼 느껴진다

 

 

 

 

강렬한 색상으로 알려주는 털중나리꽃에 시선이 머물고

연록의 푸르름에 생동감이 넘치고

여느산에서 볼 수 없는 방장산의 특징 하나는 산딸기가 지천에 널려 있다

 

 

 

 

조망터가 여러곳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은 전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산은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을 폼내는데

무등산의 무자도 볼 수가 없고 주위 모든 산들이 연무로 인하여 풍경을 삼켜버렸다

 

 

 

 

방장산은 부드러운 육산이지만 거친 바위를 품고 있다

길지않은 능선길이 꽤나 버겁게 느껴는데

오늘 나는 <방등산가>의 주인공인 그 여인을 만나러 왔는데 만날 수 있을런지~

 

 

 

 

평야지대에 걸출하게 산세를 이르킬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으니

방장산을 허락하는 산 길이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는 않은 것 같다

 

 

 

 

봉수대(烽燧臺, 715m)는 없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고

넓은 공터는 헬기장으로 되어 있다

옛날에는 호남의 상황을 서울에까지 알리는 중요한 역활을 했을 것으로 본다

 

 

 

 

성벽처럼 둘러쳐진 봉수대에서 광활한 고창벌판을 바라보니

휘몰아치는 구름의 풍광이 역동적이다

전망좋은 곳에 자리를 펴고 산상만찬을 즐기니~ 우리 또한 임금님 밥상이 부럽지 않구나

 

 

 

 

조망이 좋았다면 무등산을 비롯해 주변에 산들이 실루엣으로 넘실 거렸을 것인데

오늘은 방장산이 자기만 쳐다보고 가란다

원래 봉수대가 방장산(742.8m)보다 높았으나 6.25때 폭격을 받아 높이가 방장산보다 낮아졌다 한다

 

 

 

 

자연과의 사랑은 소박한 관심으로부터 사랑을 배워간다

숲속에 한줌의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어 줄 때

나는 숲속에서 산새와 애기하고 숲속에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을 느낀다

 

 

 

 

원래 방장이란 우두머리 또는 수장이란 뜻을 의미하고 있다고 한다

소림사 주방장도 아니고 왜 방장산이란 이름이 붙었는가를 의아했는데

능선을 따라오면서 조금은 이해가 가는것 같다

호남 벌판에 우뚝솟아 주변에 가장 높은 봉우리로 칼바람을 이겨내며 군림하고 있었기에 방장이 된 것이다

 

 

 

 

고창의 방장산은, 정읍 두승산, 부안의 변산과 함께 옛부터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리는 호남의 명산이다

조선 시대까지의 이름은 방등산이었다고 한다 "방정하고 평등하다"라는 뜻을 가진 "방등(方等)"이란

불교 용어라고 하며 조선인조 때 중국의 삼신산 중 하나인 방장산과 닮았다 하여 현재 지명으로 바뀌었다

 

 

 

 

방장산(方丈山, 743m)은 중국 삼신산의 하나에서 빌려온 이름으로

"산이 넓고 커서 백성을 감싸준다"는 뜻이다

산이 높고 장엄해서 절반밖에 오르지 못한다는 의미의 방장산이지만 조금은 머시기하다

 

 

 

 

<사기(史記)의 열자(列子)에 의하면>

발해(渤海)의 동쪽 수억만리 저쪽에 오신산(五神山)이 있는데, 그 높이는 각각 3만리, 금과 옥으로 지은

누각이 늘어서 있고 주옥으로 된 나무가 우거져 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불로 불사하고

그 곳에 사는 사람은 모두 선인들로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살아간다, 오신산은 본래 큰 거북의 등에

업혀 있었는데 뒤에 두 산은 흘러가 버리고 삼신산만 남았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삼신산을 본떠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으로 불러 한국의 삼신산으로 부른다

 

 

 

 

명산의 조건에는 쉬어갈 수 있는 쉼터와 이정표가 있어야 하는데

방장산은 이정표나 산길 정비가 부족한 편이다

이곳 벽오봉 갈림길에서도 조금 헤메였는데 우측에 벽오봉을 보고 내려서야 전망대가 나타난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갈미봉, 벽오봉, 억새봉, 큰솔봉이 광활한 고창벌판을 보듬고 있으며

방장산은 서쪽 기슭에 수심이 깊어 용이 승천했다는 용소와 용추폭포가 흐른다

남쪽에는 방장산 휴양림이 조성되어 있고 남쪽에 방장사가 있으며

주변에는 내장산 국립공원, 선운산 도립공원, 고창읍성과 장성군의 장성 입암산성, 백양사 등 명소가 많다

 

 

 

 

제법 넓직한 공터에 "큰솔2(637m)"라는 팻말이 무명봉에 이름을 대신하고 있다

방장산(方丈山)은 전형적인 육산의 산세를 지녔음에도 악산(岳山) 못지 않은 기개와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당당한 기세로 전남과 전북을 가르고 있는 모습에 호남의 명산으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산이지만

산세가 험악하여 백제가 신라에 멸망한 뒤 백제 유민으로 구성된 의적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들은

도적성으로 불리는 성을 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약탈하고 하였는데, 이런 활동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내려서면 송신탑 134번 좌측을 통과하여 억새봉을 향한다

전북 고창과 전남 장성의 경계에 위치한 방장산(743m)은

호남정맥 내장산과 백암산 중간에서 서쪽으로 분기한 영산기맥에서 가장 높이 솟은 봉우리란다

 

 

 

 

고창고개(高昌峙)은 전북 고창군 신림면과 장성군 북이면을 넘는 고개로

장성쪽에는 편백나무 숲이 울창한 방장산 휴양림이 있고

고창쪽의 용추계곡은 깊은 웅덩이에서 용이 승천했는데 고산자 선생이 쓴 대동여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고창고개에서 등산로는 큰솔봉(624m)을 경유하지 않고

좌측 사면을 따라 우회하여 이어진다

휴양림에서 활공장으로 올라가는 임도와 나란히 만나도 산길을 벗어나면 안된다

 

 

 

 

휴양림 갈림길에서 이정표를 만나면

패러글라이딩장 방향으로

산길을 따라 진행하여 돌밭을 지나 억새봉에 오르게 된다

 

 

 

 

억새봉을 오르다 보면 지도상의 "돌밭"이 나타난다

너덜지대라도 어렵지 않으며,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억새봉 오름길은 그렇게 힘들지 않고 오른다

 

 

 

 

함평이공묘를 지나고 곧바로 억새봉 정상이다

어찌하여 방장산에 왔을까요?

호남의 삼신산이라 불리우는 100대명산 탐방 기행차 온 것이다

 

 

 

 

억새봉(636m)은 지도상에는 없는 봉우리로

옛적에는 억새가 많았던것 같은데

페러글라이딩 활공장을 만들면서 어린 잔디로 바꾸면서 억새가 없어졌다

 

 

 

 

주변 환경이 좋아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다

동호인들의 깃발이 바람에 펼럭이고

방장산 뒷쪽으로 내장산과 백암산이 위치만 가늠이 될 뿐! 속시원히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억새봉에서 바라보니 고창읍의 광활한 들녘이 한 눈에 보이고

날씨가 좋으면 서해바다도 보이는데 아쉽다

고창(高昌)이라는 지명은 높고 넓은 들(보리밭)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남편이 구하러 오지 않음을 탁식한 여인의 노래 백제 가요인 "방등산가(方等山歌) 기념비가 있다

方登山 在羅州屬縣 長城之境 新羅末 盜賊大起 良家子女 據此山

방등산 재나주속현 장성지경 신라말 도적대기 량가자녀 거차산

多被擄掠長日縣之女 亦在基中作此歌 而諷其夫不卽來救也

다피로략장일현지녀 역재기중작차가 이풍기부불즉래구야

방등산(方登山)은 나주의 속현(屬懸)인 장성(長城) 경계에 있다

신라말엽 도적이 크게 번져 이 산에 은거하여 양가(良家)의 자녀들을 많이 잡아가는 등 노략질을 했다

이 때 장일현(長日縣)의 한 여인이 이 가운데 있었는데 이 노래를 지어 그 남편이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을 한탄한 노래라 한다

억새봉 정상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전환하면 전주이공묘와 개활지를 지나 <방등산가 기념비> 우측의 산길로 벽오봉을 오른다

 

 

 

 

벽오봉(방문산, 640m)은 억새봉에서 2분 거리에 있으며, 방문산으로도 불린다

저 아래 고창의 인물로는 녹두장군으로 불리는 전봉준과 미당 서정주 선생

명창 동리 신재효, 그리고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씨가 이곳 고창 출신이다

 

 

 

 

벽오봉(壁梧峰, 640m)은 전북 고창군 신림면과 고창읍과 전남 장성군 북이면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지도상에는 방문산(方文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이는 방문산(方文山)과

한 산줄기에 있는 방장산의 가운데 글자인 어른 장(丈)을 글월 문(文)으로

잘 못 해석해서 붙혀진 이름으로 본래 방문산은 벽오봉으로 불렀다고 한다

"벽오병의 유래를 살펴보면" 예전에 고창 주변이 바다였을 때 오동나무를

싣고 가던 선박이 벽오봉에 부딪혀서 난파된 뒤 이곳에 오동나무가 자생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발아래 공설운동장이 보이고 고창하면 복분자와 수박 그리고 남성들이 좋아하는 풍천장어가 생각이 난다

풍천장어는 실뱀장어가 민물에서 8년간 성장하다가 산란을 위해 태평양으로 회유하기전 바닷물과

민물의 합류지점에 머물 때 잡힌것을 지명과 함께 붙여진 이름이 풍천장어라 한다, 미식가들이

풍천장어를 애써 찾는 이유는 그 맛이 단백하고 육질이 쫄깃하기 때문이며 특히 복분자술과 어우러진 맛이 일품이다

 

 

 

 

방장산 남쪽 백암리의 수도골에는 절이 많았다하고 옛부터 한말에는 천주교인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동으로 헬기장봉과의 사이에 유독 흰바위로 이루어진 절벽이 있었는데, 이 바위에서

백암마을 이름을 짓고, 삼한시대의 성으로 전해오는 벽오산성(壁梧山城)이 벽오봉의 이름을 남긴 것으로 짐작한다

 

 

 

 

고창군에서 산허리를 마구 해친 다음 MTB 도로 만드는 작업을 해 놓았는데

산 전체가 흉물스럽게 변해가고 있어서 안타깝다,산악자건거 타러 오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는 몰라도 지자체의 전시성 행정으로 되어서는 안될것이다

 

 

 

 

고창읍의 동쪽을 가로막고 있는 방장산 줄기는 전북과 남도의 경계를 이룬 산으로

최근에는 산 남쪽 기슭에 방장산휴양림이 들어서고 고창읍 석정리에는

석정온천이 있어 자연휴양림과 온천을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산행지로 인기가 많다

 

 

 

 

<방장동굴은 일명 도적굴이다>

신라 말년에 온 세상이 어지러워 도둑들이 고창 방등산(方等山)의 방장동굴에 본거지를 두고 고창 지역의

풍요로운 들녘에서 생산된 곡식을 훔치고 양가의 부녀자들까지 납치해 갔다, 그 가운데 도둑들에게

잡혀간 장일현(長日顯)의 한 여인이 남편이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음을 탄식하여 부른 노래가 <방등산가>이다

 

 

 

 

문암이재(문너머재)는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으니까

잠시 쉬어가라고 쉼터가 마련되어 있으며

우측으로 산림욕장, 공설운동, 석정웰파크 시티로 내려가는 삼거리 갈림길이다

 

 

 

 

갈미봉(별봉, 579m) 정상 아래에 무명묘지 1기가 있고

이곳에서 우측 방향은 고창 수월리 방향이고

방장산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영산기맥과 양고갈재는 왼쪽 방향이다

 

 

 

 

배넘이재는 예전에 고창주변이 바다였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호남정맥의 주월산 배거리재처럼 바닷물이 밀려와

배가 고개에 걸렸다든지~ 또한 배가 넘어 다녔다는 뜻이 아닐런지~

 

 

 

 

호전한 대밭길을 내려오면 삼거리에 방장사 해우소가 있다

해우소에서 좌측으로 방장사(方丈寺) 절이 있고

절에서 삼배의 예를 올리지 않으실 분은 우측 방향인 양고살재로 내려서면 된다

 

 

 

 

방장사는 전북 고창군 고창읍 석정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백양사의 말사이다

벽오봉(방문산)의 절벽 아애 자리잡은 작은 규모의 암자로 절집이 산 아래로

내려간 다음 현재의 사찰 건물은 1965년 법륜(法輪)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암자는 법당과 요사채, 산신각, 선방으로 이루어진 최근에 세워진 건물로

관세음 보살좌상을 봉안하였고, 보살상 뒤에 후불탱화가 있고

방장사 산신각은 여느 사찰에서와 달리 대웅전이나 그 크기가 별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저 너머로 흘러가는 영산기맥 산봉들은 언제 또 돌아 볼 수 있을 꼬~

아래로 웰파크시티 내에 있는 석정CC가 보이고

방장사(方丈寺) 뜰에서 조망이 좋은 날은 멀리 서해바다까지 눈에 들어온다

 

 

 

 

산행을 하면서 꼭 이것만은 지켜야 할 세가지가 있다

튼튼한 두 다리, 호기심 그리고 감동이다

남아 있는 삶을 위해선 세상에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것이 이 세가지다

 

 

 

 

급경사를 내려서면 넓다란 임도를 따라 양고살재에 도착한다

우리에게 자연이 가까이에 있듯이 모든것을 고맙게

기억하면 행복 또한 항상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양고살재(楊古殺峙)는 전북 고창군 석정리에서 전남 장성군 북이면 죽청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이다

양고살재는 병자호란 때 고창 출신 박의장군이 누루하치의 사위인 적장 양고리를 살해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지만 국통지리정보원의 지명 유래에는 큰 재(峙), 작은 재(峙)

두 개가 있다고 하여 양고령이라 부르며 양고령이 발음 변화로 양고살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

 

 

 

 

세상살이 뭐 별거 있나요? 열심히 산을 오르면서 산이 보여주는 호의에 감사하고 산 길을

오르다가 힘이들면 노래 한곡 흥얼거리면 음정과 박자가 안 맞으면 어떻습니까?

목 쉰 음성이라도 내가 불러 기분 좋으면 그만 아닌가요^^ 영산기맥은 악명높은

길이라고 하였는데, 오늘 걸어온 구간은 남도의 인심만큼이나 후덕덕하고 편안한 길이었다

 

◎ 산행인원 : 울~몽실님과 함께     ◎ 산행시간 : 06 : 40 ~ 13 : 50  (07시간 10분)      ◎ 날씨 : 아주, 맑음

 

 

 

 

지금 내가 산(山)을 오르는 것은 산이 아니라, 자신이 오르고 있는 것이다

가파른 오름길에서 치열하게 싸워 내 자신을 넘고 싶을 뿐이며~^^

정작 이기고 싶은 것은 세상이 아니고, 산도 아닌 자신과의 싸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