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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간 9정맥종주▩/백두대간(완주)

백두대간 7구간(덕산재-우두령) 종주산행

백두대간 제7구간(덕산재 - 삼도봉 - 우두령) 종주산행

◎ 산행일시 : 2012년         08월          06일          (월요일)

◎ 산행위치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 산행구간 : 덕산재(德山峙) - 부항령(釜項嶺) - 백수리산(1,034m) - 박석산(1.170m) - 삼도봉(三道峰, 1,178m

                      삼마골재(1,015m) - 밀목령(密木嶺, 950m) - 석교산(石橋山, 1,507m) - 우두령(牛頭嶺, 720m) 

 

◎ 산행거리 : 덕산재 ~ 4.9Km ~ 부항령 ~ 2.7Km ~ 백수리산 ~ 2.6Km ~ 박석산 ~ 2.9Km 

                      삼도봉 ~ 2.9Km ~ 밀목령 ~ 3.9Km ~ 화주봉 ~ 3.5Km ~ 우두령(901번지방도) 

                      도보거리   =   약  23.7Km           실제도보거리   =   약 25.5Km

 

◎ 산행인원 : 울~몽실님과 함께     ◎ 산행시간 : 04 : 40 ~ 16 : 30  (11시간 50분)      ◎ 날씨 : 아주, 맑음

 

            ◐ 한반도 등뼈를 이루는 산줄기의 백두대간(白頭大幹) 종주 산행이란?

백두대간(白頭大幹)이란? 백두산(白頭山, 2.750)의 병사봉(兵使峰)에서 시작하여 계곡이나 강(江)을 건너지 않고 산줄기 만으로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큰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고 한다, 즉 백두대간은 우리땅의 골간을 이루는 한반도의 등뼈이며

이는 우리땅 전체가 남과 북이 하나의 대간으로 이어져 있음을 뜻하며,  백두대간에서 장백정간과 13개 정맥이 갈라지면서

한반도는 비로소 삼천리 금수강산이 되었으며,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 이르는 1400Km여의 산줄기가 바로 백두대간이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곳이 없어지고, 자연을 훼손 한다면 갈곳이 없어진다

산악인은 산에 오르면 쓰레기와 추억의 사진외에는 가져오지 말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우리의 금수강산 발자국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말자

 

 

 

 

내가 지금 산(山)을 오르는 한걸음 한걸음에는 내 인생에 삶의 희망이다

지나온 나의 발자욱은 아름다운 내 인생의 흔적이 되고 있으며~

남은 세월은 늘~ 산과 함께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욕심으로 살아 가련다

 

 

 

 

덕산재를 기점으로 전북 무주와 경북 김천이 갈라진다

무풍을 지나 설천에 이르면 두 고을 사이에 무주구천동 33경 가운데 1경인 나제통문(羅濟通門)이 있다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오가던 굴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일제 때인 1910년경 일본넘들이 인근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용이하게 옮기고

그 지역의 농산물과 임산물을 신속히 옮겨가기 위하여 뚫은 굴로 당시 김천과 거창을 잇는

신작로로 개통한 "기넘이굴"로 불리던 이 굴은 1963년 무주 구천동을 관광지하면서

33경가운데 제1경 자리에 올랐으며, 나제통문이 있는 산의 이름은 석모산이고

그 산을 넘나드는 고개 이름이 "기넘이고개"였다  백제와 신라의 깃발이 넘나들던 고개라는 것이 이름이 되었다

 

 

 

 

덕산재(德山峙, 644m)는 경북 김천시 대덕면에서 전북 무주군 무풍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30번 국도가 지나간다

대덕산 아래 덕산 마을에서 따온 지명이라고 하며 일제 때 발행지도에는 주치령(走峙嶺)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빽두대간을 아름답게 보존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영호남의 경계지점의 덕산재에 커다란 표지석을 설치하여 놓았다

 

 

 

 

덕산재의 여름 아침 날씨는 쌀쌀하다

새벽하늘에선 총총한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밤하늘을 수 놓았고

별들 사이로 반쪽 허연한 달빛도

우리의 새벽길 산행에 동참하면서 싸늘한 새벽풍경을 담으며 우두령을 향해서 출발한다

 

 

 

 

통나무 계단을 발판삼아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서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833m봉을 알린다

새벽산행은 상쾌한 아침을 열어주어 기분은 좋은데  날파리 벌레떼가

심하게 달라 붙으며 신발과 바지가랭이가 이슬에 맺혀오고 거미줄을 걷히고 가야하는 불편이 있었다

 

 

 

 

새벽길 캄캄한 어둠속을 열심히 걸어가니 지도상 833m봉을 넘어선다

안부에 이정목이 있는 갈림길을 만나고 직진으로 이어질 듯한

마루금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90도 꺾어지면서 상당히 급경사 지역을 내려간다

 

 

 

 

치열하게 싸우던 옛 신라와 백제의 역사는 잊혀져 가고

금을 캐내던 광산의 폐광터만 남아 있다

폐광터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나제통문(羅濟通門)의 비빌을 알 수가 있는 곳이다

 

 

 

 

부항령으로 가는 길목엔 이정표가 설치가 잘 되어 있다

좌측으로 금평리 쇠재마을이 있는데 고려 때 죽은 사람도 살렸다는 금자를 여기에 묻었다고 하여

쇠자라고 부르다가 발음이 변하여 쇠재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한자로 금척(金尺)으로 표기하고 있는 곳으로 마을 뒤 옥녀봉(玉女峰)이란

아름다운 산에서 길게 뻗어 내린 산 등이 마치 금으로 만든 잣대와 같다고 하여 금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도상 850m봉우리로 삼각점은 수풀속에서 보이지 않는다

동쪽하늘에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온 산을 붉은 빛으로 물들이고 있어

오늘도 불볕 더위가 예상되기도 하다

명산도 없고 전망이 좋은 봉우리도 없는데, 부항령까지는 곳곳에 쉼터가 잘 되어 있다

 

 

 

 

부항령성터(釜項嶺城址)는 돌무더기만 보이는 곳으로 백제가 패망할 때까지

신라의 성토가 있던 곳으로 무주쪽은 막골과 큰 활석(割石)을 이용하여

석축을 일정한 규칙없이 쌓았기에 망루지 또는 초소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부항령(680m)은 무주군 무풍면 쑥뱅이 마을과 동쪽의 김천시 어전리 가목마을을 잇는 고개이다

부항(釜項)이란 지명은 고개 동쪽의 마을 형국이 풍수지리상 "가마솥" 같이 생겼다 하여

"가메실" 또는 "가목"이라 하다가 한자로 바꾸면서 부항(釜項)이 되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때 무풍이 신라에 속할 때 덕산재, 소사고개와 더불어 변경을 잇는 주요 통로였다고 합니다

 

 

 

 

부항령(釜項嶺) 아래에는 현재 삼도봉터널이 지나고 있다

1089번 지방도로를 확장포장 하면서 터널 이름을 부항령터널이 아닌 삼도봉터널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 내력은 전라도와 경상도 땅 경계에 있는 터널이어서 어느 한쪽의 지명을 따면 다른 한쪽이

소외되는 듯 하다 하여 궁요지책으로 이곳에서 떨어져 있는 삼도봉의 이름을 빌려와 삼도봉터널이라 했다고 한다

 

 

 

 

비박을하면서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두분을 만났다

한분은 강원도 영월사람이고 한분은 경상도 창원사람인 두사람을 만난다, <무주군 무풍면 쑥뱅이 마을은>

금평리 탄방마을로 고려 때 숯을 많이 생산했기에 숯뱅이로 불리던 게 발음이 변해서 쑥뱅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탄방으로 불리고 있는 곳이다, 김천시 어전(魚田)리 마을은 임진왜란 때

피난 온 허인(許仁)이 마을 앞 들판의 형상이 물고기와 같음을 보고 어전이라 하였다고 하며

또한 옛날 마을을 지나던 한 도인이 마을 뒤 계곡 폭포속에 많은 물고기가 노니는 것을 보고 붙인 이름이라 한다

 

 

 

 

좌측으로 970m봉을 올라서 마루금을 이어가야 하겠지만

특징이 없는 봉우리이고 날씨도 무덥고 우두령까지

가야하는 장거리 산행인지라 우측으로 우회하는 길따라 백수리산으로 오른다

 

 

 

 

백수리산의 우회길도 만만치가 않했으며 오늘은 전 구간의 우측이 김천시를 시계 방향을 따라 걷게 된다

옛날 금(金)이 나는 샘(泉)이 있었기에 불리게 된 지명인데, 이곳 출신 문인인 여이명(呂以鳴)은

조선 숙종 44년(1718년)에 편찬한 김천의 향토지인 금릉승람(金陵勝覽)에서 그 샘의 물로 술을 빚으면

맛과 향기가 좋아 그 샘물을 주천(酒泉)이라 했는데, 하지만 주민들은 금을 캐서 바치는 부역이 두려워서

그 샘물을 묻어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위치를 알지 못한다 하며 김천의 과하주는 여산주(익산의술)와

호산춘(문경의술)과 더불어 국내에서 이름난 술이란다,  김천(金泉)의 물이 좋아서 술맛 또한 다른가 보네요

 

 

 

 

백수리산 오름길의 헬기장을 된비알로 올라선다

등줄기에 땀이 주룩주룩 배어나면서 갈길은 먼데 걱정이 태산 같다

8월 한더위의 온도는 35도라는데 아직 정오도 못 되었는데 힘든 산행이 될 것으로 보여진다

 

 

 

 

백수리산(토착명 백도래산, 1,034m)은 김천쪽 사람들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 산 아래 100여 호의 가옥이 있었기에 백도래산으로 불렀으며

무주쪽 사람들은 겨울이면 이 산에 눈이 많이 쌓이는데

수리를 닮은 이 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하얗게 보이기에 백수리산이라 불렀다 한다

 

 

 

 

사방이 탁 트인 정상의 조망으로 일출의 기운을 받아 멋지게 펼쳐지는 백두대간길

가야 할 박석산과 삼도봉을 잇는 산군들의 마루금이 활대 마냥 휘어져 있고

그 뒤로 석기봉이 보이고 산 아래에 작은 마을 몽구동(夢龜洞)은 옛날 한 선비가

이곳에 들렸다가 거북이 꿈을 꾼 후 길지로 여겨 집을 짓고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우리의 영산인 백두대간의 장엄함은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고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아름다운 산세는 지리산 천왕봉까지 보인다

 

 

 

 

좌측에 무풍면의 행정 중심지인 현내리는 옛 신라의 무산성(戊山城)이 위치해 있던

고을이기에 읍성이 설치 되었던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신라의 성이 394개 되었었고 백제의 성은 200개에 불과 한 것에 비하면 두배나 많았다고 한다

 

 

 

 

박석산(1,170m)은  삼각점 주변에 야생화가 산객의 눈길을 끌었으며

지도상에도 표기 되지 않은 지명인데

어떤 연유로 부르게 된 이름인지 알 수가 없었으며 조망도 없어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싸리나무와 참나무들이 빽빽한 우사면으로 내려가니 습지대의 목제테크를 지난다

이로 인하여 산꾼들은 초원지대의 운치를 볼 수 있었으며

주위로 토사의 유실이 심해서 식생보존을 위해 생태게 보호차원에서 설치한 것으로 생각이 든다

 

 

 

 

박석산을 넘어서면서 부터는  좌측은 설천면이고 우측은 김천시이다  설천면(雪川面)은 조선 영조 때

이봉상(李鳳祥, 1676~1728)이 이곳에 살면서 자신의 호를 설천(雪川)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하고 구천동에 9천 명의 승려들이 수도할 때 이들의 밥을 짓기 위해서

아침저녁으로 쌀을 씻던 하얀 쌀뜨물이 이곳까지 70리 계곡 길을 따라

온통 눈과 같이 하얗게 흘러 내렸다 하여 눈 설(雪)자 내 (川)자를 써서 雪川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도 합니다

 

 

 

 

초원지대를 지나면서 뒤돌아본 박석산의 풍경으로 우측에 설천면 미천리(美川里)는 옛날부터 피난지로

명성이 높아 국난이 있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동네를 이루었던 곳으로

지금도 정착지 마을 터가 자리잡고 있으며 산림이 울창하고 흐르는 계곡물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미래라고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아름다운 내가 흐르는 곳이라 하여 미내 즉 미천이라 개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울창한 참나무숲이 있는 곳을 지나는데 햇빛을 막아주어 고맙기는 하였는데

날이 뜨겁고 바람도 없으니 모기떼가 극성을 부리면서

죽을 맛이라 울~몽실님 힘들다고 한숨을 토해내어 갈길을 멈출수 없어

시원한  맥주한잔으로 갈증을 해소시켜 힘을 내어보지만 이 퇴약볕에 사서 고생을 합니다

 

 

 

 

산삼약수터 갈림길 좌측으로는 전라도 중미마을로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경북 김천시 헤인리 방향이다

좌측의 안골로 내려가면 미천리와 대불리로 향하게 되는데 미천리의 지형이 미륵의 형상을 닮아

언젠가는 미륵이 올 땅이라고 해서 붙여지게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마을뒤 골짜기에는 보사골이라는 곳이 있고  석기봉 아래 깊은 계곡에 위치한 안골에

"하미로 불리는 "아랫미래" 중미로 불리는 "웃미래" 등 불교용어가 남아 있으며 대불리는 계곡 어딘가의

땅 속에 묻혀 있는 부처님이 땅 위로 나올 때는 극락정토가 이루워진다는 전설이 있어 부르게된 지명이다

 

 

 

 

해인산장은 빙벽등반을 좋아하는 토박이 김용원님이 1998년 등산객의 잠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개장한 곳이다

부항면 해인리는 신라시대 때 마을 뒤 삼도봉 골짜기에 해인사란 절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며

이 해인사가 경상남도 합천군으로 옮겨 간 것이라고 생각하나 확인할 길이 없으며

해인산장에서 해인동으로 내려가면 도로변에 마치 몽둥이처럼 생긴 큰 바위가 튀어나와 있는데

옛부터 유명한 고추방골의 남근석으로 아들을 낳기를 염원하며

치성을 올린 많은 여성들이 효험을 얻었다고 해서 유명한 곳이며, 나무그늘에서

산상만찬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명성이 자자한 남근석(男根石)을 바라보고 기를 얻어서 삼도봉을 올랐다

 

 

 

 

이렇게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보기위해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고생스런 발길을 옮기고 있는지도 모르며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제일 행복한 순간이 아닌가 싶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 남한의 "북도(北道)"가 유일하게 만나는 지점이다

경상북도, 전라북도, 충청북도가 꼭지점에서 만나는 지점으로

삼도봉(三道峰)으로 삼도봉 삼도탑(三道峰, 三道塔)은 각도 방향으로 용(龍) 모양이 바라보고 있다

 

 

 

 

삼도봉(三道峰, 1,177m)은 경상북도 김천시 해인리와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 그리고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대불리의 경계가 되는 산봉우리기에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 조선을 8道로 분할할 때 삼남의 분기점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이기도 하였으며 이후 3道의 지리적 행정적 경계인 동시에

3南 지방 방언의 갈래길로 三道大和合의 새로운 장을 열면서 3道를 상징하는 和合塔을 만들었다고 한다

 

 

 

 

삼도봉 대화합기념탑(三道 峰 大和合己念塔)은 3道의 각 방향으로 응시하며

머리 치켜든 세 마리의 거북이 등에 포효하는 용이 중앙 꼭대기에 검은 여의주를 이고 있는 모습으로

상륜부 오석원구는 둥근 해와 달을 의미해 서로 힘을 합쳐 빛을 발하게 하면서

영원한 지역 간 화합을 추구하고 탑신부 삼각형 용조각은 웅지, 기상, 등용, 길상으로

영원한 발전을 의미하며  청룡 3마리는 충북과 전북 및 경북의 3道를 상징하고 있는데

기단부 삼각형 대리석 거북 조각은 기둥과 원구의 뜻을 거북이가 영원히 받들어 줌을 의미하고 있은 것이다

 

 

 

 

강원도 영월분으로 10일째 비박을 하면서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분과 만나 기념사진을 남겨본다

이곳의 삼도봉은 지리산의 삼도봉(날나리봉)과 거창 삼도봉(초점산)이

전라도와 경상도의 도계를 중심으로 명명된 곳이지만 전라북도와 충청북도 및

경상북도 의 3도(三道)가 접하는 명실상부한 곳이라 오리지널 삼도봉(三道峰)으로 불리우고 있다

 

 

 

 

발아래 해인리(海印里)와 좌측으로 대야리(大也里)의 풍경이다 대야리(大也里)의 원래 지명은 천지(天地)였는데

나라에서 임금이 살지 않는 곳을 이름을 천지로 하는 것을 있을 수 없다 하여 하늘 천(天)자에서 한(一)을 빼

큰 대(大)자로 고치고 땅지(地)에서 흙 토(土)자를 빼 어조사 야(也)자로 고쳐 대야(大也)로 변경하였다고 한다

 

 

 

 

삼도봉은 어느 산처럼 빼어난 절경이나 불교유적이 없고 그리고 기암절벽이나 폭포도 없는 소박한 "無慾之山"이다

옛날에는 민주지산 끝자락에서 각호봉까지 호랑이가 누비고 다녔다는 전설이 있으며,  물한계곡과

능선길에 진달래와 산죽, 잣나무 숲으로 유명하며 삼도봉이라 명명되기전에는 화전봉(花田峰)이라 불렀다고 한다

 

 

 

 

삼마골재는 우측의 부항면 해인리에서 영동군 상촌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해인리와의 사이에 삼막골(蔘幕谷)이 있어 불리게 된 이름으로 본래는 산막골이라 불리다가 삼마골로 변음된 것이며

영동군 상촌면 물한계곡(勿閑溪谷)은 물이 차고 많으므로 불리는 이름으로

삼도봉, 석기봉, 각호산, 민주지산에 둘러싸여 원시림을 잘 보존하고 곳곳에 야생 동식물이

살고 있느 생태관광지로써 황룡사부터 용소(용이 살았다는 웅덩이)에 이르는 구간이 가장 아름답고 한다

황용사(黃龍寺)는 물한계곡 안에 있었던 신구암(神龜庵)이라는 절을 복원하는 의미를 담고 삼도봉의 정기를

이어받아 부처님 법력을 빌어 민족 화합과 남북통일 및 국태민안의 성취라는 서원 아래 1972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헬기장을 지나고 밀목령가는길 지명답게 수풀이 우거져 발길을 붙잡는다>

좌측의 석기봉(石奇峰, 1,242m)은 암석이 옹기종기 쌓여 멀리서 보면 송곳니나 피라미드처럼 삼가뿔 모양의

기인한 돌로 된 봉우리로 보이기에 불리게 된 이름인데  가까이서 보면 쌀겨처럼 생겼다 하여 쌀개봉

또는 식품봉이라고도 부르기도 하고,  산에 바위 옷인 석의(石衣)가 많아 석의봉(石衣峰)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지도상 삼각점이 있는 1123.9m봉우리이며

이곳에서 봉우리 우측 사면으로

철쭉군락지를  돌아가다가 마루금은 우측으로 꺾어지면서 진행한다

 

 

 

 

안부에 내려서면 이정표에 "밀목재"재라 씌여 있다 실제의 밀목재는 아니며

지금은 이곳을 밀목재로 통용되고 있는것 같으며 본래의 밀목재는 이곳에서 3분더 가야 한다

밀목령(密木嶺, 950m)은 부항면 대야리에서 상촌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고개라 해서 경상도 김천쪽에서는 밀목재라고 불리는 이름이며

충청도 영동쪽에서는 이 고개를 상촌면 한천마을에서 면목골로 올랐기에 면목재라 부르는 고개이다

 

 

 

 

사람키보다 큰 잡목숲을 헤치면서 강행군을 해야 하는 발길은 한없이 무거웠다

그러나 어찌 하오리까 내가 그토록 열망하던 백두대간 길이 아니오리까

쉼없이 막힘없이 걸어가리라 아무리 힘들고 힘든 사연일랑 한걸음에 묻어두고

행복했던 사연일랑 두걸음에 풀어 놓으며 뜨겁게 찐득찐득한 날씨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찐득하게 걸어 갈 것이다

 

 

 

 

폐광지역의 안내판을 만난다 김천시 부항면 대야동 마을이 있는데 다른 이름으로 대동(大洞)이라 부른다

마을 뒷골 일대에서 금맥이 발견돼 큰 규모의 금광이 생겨나 전국적인 명성을 누렸던 곳으로

김천이라는 지명으로도 알 수 있다, 일제 시대에 이곳에는 많은 금이 생산되면서

이 마을에 일본인 기술자들과 인부들이 밀려들어와 크게 번성했는데, 자연히 인부들을 상대하는

술집까지 우후 죽순으로 생겨나서 수시로 분쟁이 발생되자 급기야 마을에 지서가 들어서기도 했다고 한다

 

 

 

 

여름철이라 수풀이 자라서 등로가 보이지 않고 잡목숲을 넘나들면서 봉우리를 오르 내리지만

어디쯤인지 가늠하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쳐 왔는데

이곳은 지도상으로 1,089m봉으로  넓은 공터에 선답자의 시그널이 메달려 있어 짐작을 해 볼 뿐이다

 

 

 

 

지도상 1,175m봉은 암봉은 사방으로 조망이 트이면서 눈앞에  석교산이 보이는데

지명의 이름처럼 다리가 놓아져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발아래 부항면 대야리의 양지뜸마을과 숲실마을이 길게 자리하고 있는데

숲실마을은 옛날 무성하던 숲과 덩쿨을 쳐내고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숲실이라 부른다고 한다

 

 

 

 

1,172m봉에서 화주봉을 가기 위해서는 수직암벽을 내려서야 한다

하지만 Rope가 설치되어 있으며

잡을만한 홀드가 양호해서 내려가는데는 큰 어려움은 없는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석교산을 오르는 발걸음은 패잔병처럼 천군만근 무거웠으며

11시간이 넘는 장거리 산행으로 등줄기에는 땅방울이 비오듯 쏟아지는데

산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은 어디를 갔을까요

그바람은 좋은바람 고마운바람 이라고 했는데 그 바람은 어딜가고 숨이 막힐정도로 무덥다

 

 

 

 

석교산(石橋山, 1,207m)은 황악산과 삼도봉사이 돌다리(石橋)같은 곳으로 표현 했듯이

사방으로 여러 봉을 거느리지 않고 황악산에서 삼도봉까지

동서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한 매듭으로 보고 얕은 냇물을 건너는 돌다리 같은 산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또한 석교산을 6.25때 피난 온 주민들이

화전을 일구며 생활고를 해결했기에 화주봉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대야리 사람들은 숲실뒷산으로도 부른다

 

 

 

 

석교산은 사방으로 조망이 트이는 곳이다 동쪽은 구미 금오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동북쪽으로는 황악산이, 서쪽은 1,175>m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우며

삼도봉, 대덕산,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능선들이 파도처럼 일렁이면서 장엄하게 스카이라인을 이룬다

 

 

 

 

날씨가 무덥고 습도가 많아서 카메라 레즈에 습기가 찰 정도로 무더운 날씨지만

하산길이 오름길이 없고 완만하게 내려가는 길이어서 다행이었으며

백두대간길의 매력이 따로 있나요? 자신을 테스트 해보고,

자연과 친구가 되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신을 다독이고 끌어안은 것이 매력이겠지요

 

 

 

 

앞서가는 두분 중 한분은 강원도 영월사람이고 한분은 경남 창원사람인데

부항령에서 비박하면서 우연히 만난 친구란다

벌써 10일째 산에서 비박하면서 종주하신다니 대단한 분들이죠

하루종일 함께 하면서 사진도 찍어주시고 날씨도 더운데

부항령부터 지금까지 함께하면서 우리에게 힘을 주었던 두분에게 불방을 통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우두령은 동물이동통로를 만들어 놓고 등산객들은 통행을 금지를 해 놓았다

요즘 백두대간 복원사업으로 길을 만들고 있는데

정부정책에 찬사를 보내며 출입금지구역도 풀어주시길 부탁합니더

철망펜스에 선답들의 시그널이 주렁주렁 메달려 있으면서 먼길 걸어온 산꾼들에게 환영인사를 한다

 

 

 

 

올들어 최고의 후덥지근한 날씨에 장장 12시간의 사투끝에 내려선 우두령(牛頭嶺)

백두대간 등산안내도와 함께 우두령(牛頭嶺)의 지명답게

커다란 황소 한 마리의 표지석이 우릴 반긴다 산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고

생명의 원천으로 백두대간을 영원히 보존하고 아끼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백두대간 표지석을 세웠다고 한다

 

 

 

 

우두령(牛頭嶺, 720)은 소가 멍에(질매)을 진 것 같다 하여 질매재라고 부르기도 하고

소처럼 생긴 산으로 소의 머리 부분을 잘라 고개를 만들었다 하여 

우두령(쇠머리재)이라 부르기도 하는 고개로 절개지를 연결하는 동물이동통로가 설치되어 있다

 

 

 

 

동물이동통로 아래에는 김천시 부항면 마산리 수부동(壽富洞) 주민들이 날씨가 너무 더워서

이곳에 피서를 와서 즐기고 있었는데 정말로 시원하고 피서지가 따로 없었으며

주민들의 따뜻한 인심과 먹거리에 힘들었던 긴 여정을 보상받는 그런 기분이었다

오늘 함께한 산 친구들은 이곳에서 비박하고 내일 또 추풍령까지~ 아무튼 무탈하게 안산하시길 기원합니다

 

 

 

 

우두령(牛頭嶺)은 901번 지방도로가 지나가고 경북 김천시 부항면과 충북 영동군 상촌면을 잇는 고개로

낙동강과 금강수계의 발원지이다 일제 때는 부근의 금광개발로 이 고개가 성시를 이루웠지만

지금은 백두대간의 등줄기로 남북을 잇는 대동맥의 길로 산꾼들이 찾고 있으며 후덮지근한 날씨에

장거리 산행으로 굉장히 힘들었지만 악 조건속에서도 백두대간을 완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산행을 마감한다

 

◎ 산행인원 : 울~몽실님과 함께     ◎ 산행시간 : 04 : 40 ~ 16 : 30  (11시간 50분)      ◎ 날씨 : 아주, 맑음

 

 

When a Child is born - Sarah Bright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