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정맥 제7구간(진고개 - 금성산 - 조룡대)까지 종주산행▣
◎ 산행일시 : 2014년 04월 14일 월요일
◎ 산행위치 :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이인면 / 부여군 부여읍, 조천면, 규암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 산행구간 : 진고개 - 깃대봉 - 감나무골고개 - 감토봉(262m) - 가자티고개 - 신앙고개 - 조석산
청마산 - 청마산성터 - 청마고개 - 석목고개 - 금성산 - 부여여고 - 부소산 - 조룡대
◎ 산행거리 : 진고개 ~ 2.7Km ~ 감나무골고개 ~ 2.5Km ~ 가자티고개 ~ 2.1Km ~ 신앙고개 ~ 3.8Km
조석산 ~ 4.2Km ~ 석목고개 ~ 1.3Km ~ 금성산 ~ 3.7Km ~ 부소산 ~ 1.3Km ~ 조룡대
도보거리 = 약 22.5Km 실제도보거리 = 약23.5Km
◎ 산행인원 : 울~몽실님과 함께 ◎ 산행시간 : 07 : 30 ~ 15 : 35 (08시간 05분) ◎ 날씨 : 흐림, 맑음
◐ 호서지방의 뼈대를 돌아가는 산줄기의 금남정맥(錦南正脈)이란? ◑
금남정맥이란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가지를 뻗은 금남,호남정맥이 전북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의 경계인 모래재 북쪽
조약봉 분기점에서 다시 호남정맥과 분기하여 금남정맥은 북으로 금강과 나란히 치달으면서 연석산, 운장산, 장군봉
대둔산, 계룡산, 망월산, 등을 거쳐 부소산을 지나 낙화암으로 유명한 백마강 조룡대까지 총 128Km에 이르는 산줄기를 말한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곳이 없어지고, 자연을 훼손 한다면 갈곳이 없어진다
산악인은 산에 오르면 쓰레기와 추억의 사진외에는 가져오지 말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우리의 금수강산 발자국외에 아무것도 남기지말자
***** 금남정맥 제7구간(진고개-구드래나룻터) 산행지도 *****
진고개는 일제시대와 한국전쟁당시에는 중요한 군사도로였다고 한다
고갯마루가 비만오면 질척거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예전에는 마누라 없이는 살았어도 장화 없인 못 살았다고 하는 곳이다
오늘 산행의 종점인 부여는 백제가 찬란한 문화를 꽃피였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땅이다
망국의 한을 안고 의자왕이 배를 타고 끌려갔던 백마강은 애잔하게 지금도 흐르고 있으며~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 아래 조룡대가 금남정맥이 끝나는 곳으로 흥분속에 발을 올려 놓는다
옛 고도(古都)인 부여로 들어가는데, 산객의 관심을 끌만한 산명은 하나도 없다
감토봉, 금성산, 부소산 역시 산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모르는 산이며~
산들이 대부분 사유지여서 비산비야의 구릉지대를 지나가야 하는 어려움이 예상된다
우측 큰크리트관 제조업체 덕지기업이 생기면서 정맥길이 절개지가 되었다
오늘 따라 닭 벼슬을 하고 있는 계룡산이 눈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고~
아침 햇살에 계룡산 능선이 꿈틀거리면서 주변에 모든 산들을 호령하고 있다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 요즈음처럼 만물이 생동하는 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런지~
세상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산정에 들어서는 사람만이 알 수 있으리라!
힘든 사람에게는 악담처럼 들리겠지만 자연속에 있으면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을 어쩌리~
오늘 첫 봉우리에 올라서니 "깃대봉"이라는 팻말이 걸린 산봉 하나를 넘는다
등로 엎에는 삼각점이 있고 또한 박건석님에 코팅지가 걸려 있으며~
깃대봉은 일제시대에 침략의 수탈로 측량하면서 깃대를 사용한 것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방화선처럼 넓은 밤나무밭을 지나면 우측으로 삼각리가 보인다
공주시 탄천면에 속한 삼각리(三角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국사봉, 월봉, 매봉의 세 봉우리 사이에 위치한 곳이라하여 삼각리이다
산 이름 한번 참으로 특이한 "안경구덩이산"이라는 봉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어제는 개코빼기산을 바라보고 왔었건만, 안경구덩이 산이라니~
안경구덩이산은 공주시 탄천면 남산리에 있는 산으로 안경골에서
금광이 많이 있어 안경을 쓰고 금을 발견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선답자의 시그널이 주렁주렁 반기는 지도상의 173m봉을 지난다
금남정맥의 종주 산꾼들이 저력을 보여주는 명함철들!
지도한장으로 정맥을 종주하는 나에게는 등불과도 같은 눈부신 명찰이다
고개이름이 있을 법한 사거리안부를 가로지른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고개 이름이 없으며~
수레길이 뚜렷한 고개 좌측 절개지를 오르면서 맥길을 이어간다
215m봉은 정상 직전에 좌측으로 우회하면서 진행한다
등로상에 산 벗꽃이 아침 햇살에 활짝 웃어주고~
건너편으로 금남정맥의 산줄기가 마지막 길을 기다리고 있다
감나무골 시멘트 도로를 만나면 맞은편 절개지를 타고 오른다
탄천면 삼각리와 정치리 감나무골을 잇는 고개이며~
감나무밭은 보지도 못했고, 차라리 밤나무골고개가 어울리지 않을까?
감토봉(甘土峰, 262m)은 오늘 산행 중 최고봉이지만 아무런 표식도 없다
다행인 것은 박건석님의 코팅지가 감토봉이란 이름을 달고 있으며~
그래도 오늘에 최고봉에서 인증샷을 날리고 우측으로 90도 꺾어서 내려선다
만물이 생동하는 연록의 숲길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예전에 선답자의 시그널이 주렁주렁 메달려 있었는데~
가지가 무게를 견지지 못하고 부러져 환영받지 못하고 지나간다
가자티고개는 충남 공주시 탄천면 가척리와 남산리를 잇는 고개이다
가척재(加尺峙)라고도 불리우며, 799번지방도가 지나가며~
좌측으로 막아논 철조망에 문을 달아서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가척재를 자척(尺)를 쓰면서 가자티개로 불리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도로 건너편에 산행안내도에 금남정맥 지도가 그려져 있었으며~
잠시 산행지도를 숙지하고 뒷쪽 절개지를 오르면서 정맥길을 이어간다
<됨봉(160m)은 공주시 남산리에 있는 작은 산이다>
성골 마을이 뒤웅박(됨박)처럼 생겼다 하여 됨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됨봉에 올라서면 아무런 표식도 없으며~
우측으로 약간 벗어난 지점에 한현우님의 코팅지가 됨봉임을 알려준다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우측 숲길로 정맥길이 이어진다
호남정맥의 화순군과 등로가 비슷한 수준인 듯!
산행을 하면서 정상석은 고사하고 이정목 하나 본적이 없다
호젖하고 평이한 소나무숲길을 따라 산책길이 계속 이어진다
길바닥에는 솔깔비가 수북하게 깔려져 있으며~
깔비는 경상도식의 발음으로 솔잎을 뜻하는데, 알랑가 모르것다
부여군 조천면 지역은 공주시처럼 산에 대한 관심이 없는가 보다
이정표도 없고 등로가 엉망이라 어려움이 있는 구간이지만
독도 공부를 열심히고 하고 시그널을 잘 찾아가면 알바 할 일은 없다
지도상에 표기된 신앙고개는 좌측으로 성황당 흔적이 있다
사람이 다니는 흔적은 없어서 길이 묻혀져 버렸으며~
부여군 조촌면 세탑리(신탑골)와 공주시 탄천면 가척리(돌정)를 잇는 고개이다
좌측으로 천주교 묘역을 바라보고 올라서면 187m봉에 올라선다
홍성산꾼들의 표지판이 있고, 정맥길은 10시 방향이며~
함께 했던 탄천면과 헤어지고 부여읍을 만나 구드래나룻터까지 부여군을 지난다
아침 일찍 걸어오면서 이곳까지 사람 한명 구경을 못했다
금남정맥 마지막길을 통채로 빌린 느낌이 들었는데~
유일하게 노루 한 마리를 만났는데 카메라를 꺼내기전 전에 도망가니 어쩌라~
부여군 조촌면 신탑골이 보이는 곳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신앙고개이다
백제 26대 성왕 때(538) 옹진(공주)에서 부여(夫餘)로 옮겨왔는데~
수도를 부여로 옮겨 의자왕(660)까지 123년간 백제의 도읍지가 되었던 곳이다
일명 신 신앙고개로 좌측으로 부여군 조촌면 신암리와 연결된다
우측은 부여읍 상금리 배밭골로 열결되는 고갯마루이며~
임도이지만 지금도 차량이 지나가는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고개이다
오늘 처음 만나는 이정목은 감투봉갈림길로 수자원공사 방향이다
감투봉은 부여군 조천면 신암리에 위치한 산인데~
감투봉의 팔각정을 다녀오기에는 거리가 먼 것 같아 그냥 지나친다
이제 막 땅을 박차고 나오는 새싹들이 앙증맞기 그지없다
모든 것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따스한 봄 날씨가 흥겹듯이 산꾼도 산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지도상의 182m봉 오름길에서 정맥길은 좌측으로 틀어지면서 조석산과 청마산이 조망된다>
금남 정맥이 금강 하구가 아닌 부여로 간 까닭은 부여라는 백제의 고도(古都) 때문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정맥의 기준은 무엇일까 "분수령" 즉 물길을 나누는 것이 정맥 구분의 핵심이다
낙동강 수계를 따라 낙동정맥이 있고, 호남정맥은 섬진강 수계를 따르고 있으며, 한강 수계를 따라
한북과 한남정맥이 울타리를 이루고, 금강 수계는 금북과 금남이 있는데, 이 모든 정맥의 공통점은
바다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왜 큰 강줄기를 에워싼 큰 울타리가 정맥이기에 운명을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거다, 산줄기가 있기에 강줄기가 있는 것이고, 강이 있어 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산이 있어 강이 있는 것이다
김포포구와 낙동강포구, 망덕포구 등은 바다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곳인데, 부여만 그렇지 않다
바다는 이곳 부여에서도 100여리 훨씬 밖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산경표상의 "금남정맥"은 다른 정맥과 달리 원칙을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즉 진정한 금강의 울타리가 아니라, 대둔산과 정감록에 등장하는 명산인 계룡산을 차마 정맥 줄기에서
뺄 수가 없어서 이쪽으로 산줄기를 연결 시켰다는 것이다, 박성태씨가 신 산경표에서
뽑아낸 "금강의 울타리의 금남정맥"은 약간 다르다, 싸리봉에서 군산쪽으로 뻗어가는
산줄기를 사실상의 "금남정맥"으로 보고 있고, 부여쪽 산줄기는 "금강기맥"이라 한단계 낮추어 이름을 붙이고 있다
통신탑 우측으로 큰덕골 축사가 내려다 보이고, 왼쪽으로 청마산이 눈에 들어온다
송전탑 윗쪽 봉우리가 지도상의 183m봉으로 조석산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청마산을 조석산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며, 산 이름이 지도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좌측으로 하산길이 있는 평정말갈림길에서 두번째 이정표를 만난다
정맥길은 이정표의 신암리회관 방향으로 올라서야 하며~
주변에 산들이 벌목되어 좌측으로 신암리 평정말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송전탑을 통과하여 완만하게 오르면 성터의 흔적이 있는 곳을 오른다
발굴작업을 하려는지, 온통 나무들을 벌목을 해 놓았으며~
조망이 좋은 곳이지만 스모그 현상으로 멀리 보이지 않아 그냥 올라간다
조석산(182.9m)은 충남 부여읍 능산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성터의 흔적이 있고, 고스락에는 작은 쉼터가 있으며~
용정리와 송곡리로 산길이 열려 있지만 정맥길은 좌측 11시 방향이다
고스락 공터에는 이정표가 있지만 이정표가 얄굿다
부여군은 그렇다 치고~ 굿 뜨레는 무엇인지~
선답자 후기글에는 삼각점이 있다고 하였는데 찾지를 못했다
청마산 분기점 이정표에 금동대향로의 유적지가 이채롭다
백제의 수도에 왔음을 실감케 하는 것 같았으며~
청마산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70m 떨어져 있어 갔다가 되돌아와야 한다
청마산(233m) 정상은 아무런 특징도 표식도 없는 봉우리다
다만 서래야 박건석님의 코팅지가 걸려 있을 뿐이며~
부여읍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했는데, 아쉽게도 조망 마져도 꽝이다
갈림길로 되돌아와 쉼터에서 배낭을 내리고 산상만찬을 즐기고 간다
이곳에서 부터 가스충전소라는 이정표가 안내를 하고 있었고
석목고개에 있는 충전소인데, 산길에 LPG충전소 이정표라니
이정표 제작에 일조를 하였는지 모르지만, 등상로에 어울리지 않은 명칭이다
통신안테나가 있는 183m봉의 작은 봉우리를 넘는다
무인산불감시 카메라가가 설치되어 있으며~
좌측 아래에는 고분군으로 유명한 능산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남쪽 방향으로 부여터널이 시원하게 지나가면서 백마강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실감케 한다
저 멀리서 백마강의 노래가 들려오는 듯한데,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꿈이 그립구나~ 오늘 낙화암을 한번 둘러보자
청마산성(靑馬山城)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백제 때의 산성으로 사적 제 34호이다
부여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월명산(月明山)에 축조된 포곡형의 토석혼축산성으로 우리나라 고대 성곽중에 최대 규묘이다
성안에는 망대, 건물터를 비롯해 경용사지(驚龍寺址), 의열사지(義烈寺址) 등의 절터도 있다
서쪽에는 수구(水口)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성벽이 무너져 확인되지 않고
이 산성의 기능은 수도인 사비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성 남쪽에는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고, 청마산성 표지석은 글씨의 흔적마져도 희미해져 버렸다
부여읍 능산리와 용정리를 잇는 고개로 지도상에는 청마고개로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체마소(滯馬所)고개로 알려져 있는데
백제시대에는 이 일대에 말(馬)을 조련시키는 병영(兵營)이 있었단다
고개의 북향에는 "성심껏 노인을 돌본다" 하여 노인복지법인 "성심원"이 등지고 있다
청마고개에서 왼쪽으로 백제의 왕과 왕족들로 추정되는 능산리 고분군이 있다
왕릉원이라고도 불리는데. 발굴 당시에는 대부분 도굴되었다고 하는데~
이곳 능산리는 무덤사이의 사지(寺址)에서 발견 되었다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유명한다
백제 금동대향로(金銅大香盧)는 1993년 12월 23일 부여군 능산리에서 발견된 것이다
국보 제 287호로 지정 되었으며, 이 향로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7세기 백제인들의 정신 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만들어진 빽제공에품이라 할 수 있다
<부여사비나성 장대지(將臺址)로 주변에 발굴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성(羅城)이란 2층으로 구성된 성곽에서 왕궁을 둘러싼 성곽을 왕성 또는 내성으로 부른다
쉽게 말하면 바깥으로 둘러싼 성곽을 나성이라 한다, 또한 장수가 지휘하던
장소를 장대(將臺)라고 하는데, 백제의 사비성에는 나성이 있었는데 그 흔적이 지금 이곳이다
장대지에는 안내판과 대리석으로 만든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또한 "사비길"이란 안내판에서 잠시 숙지 하였는데~
부소산 사자루에 이르기까지 사비길 산책로를 따라 진행하게 된다
백제 땅이라 그런지 잘 정돈된 묘지 중앙을 관통하게 된다
또한 솔향기 가득한 길이라 발걸음도 가볍고~
오늘은 마치 양넘 지갑을 줏은 것처럼 백제의 옛 정취를 느껴본다
삼거리갈림길에서 사비길(금성산)인 좌측 방향으로 전환한다
백제가 있었던 부여지방은 삼국중에서도 가장 불교 문화가 번성했던 곳이다
백제가 망하면서 백제 유민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 가면서
일본 불교는 백제 불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 교토의 광릉사에는 일본국보 1호인 반가사유상이 백제의 목불이란 것이다
청마산갈림길에서 산행길을 안내했던 LPG주유소가 이곳에 있다
등로상에서 충전소 이정표가 주유소가 있는 곳이였으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LPG이정표를 석목고개라고 하였으면 될 것을~
석목고개(성왕로)는 지도상에 SK주유소라 적혀 있다
하지만 4번국도변에는 "가나다 SK LPG 충전소"라는 현편이 걸려 있으며
정맥길은 횡단보도를 건너 우측에 있는 계단을 올라서면서 금성산으로 이어진다
금성산을 향해서 가는 길에 만난 십자성의 안부이다
정맥길은 직진 방향으로 올라서야 하며~
좌측의 가탑리와 우측 방향의 쌍북리를 연결하는 임도이다
금성산 오름길은 솔향기가 물씬 풍기는 잘 다듬어진 산책로이다
오가는 이도 별로 없고, 한적하고 호젖한 숲길이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었던 현장의 성터는 허물어지고 松林만 울창할 따름이다
금성산(錦城山, 121.2m)은 백제의 삼산 가운데 하나다, <삼국유사 남부여조에 다음과 같은 기옥이 있다>
군중에는 삼산이 있는데, 그 이름은 일산(日山)과 오산(吳山), 부산(浮山)이다
백제국 전성기에는 이들 삼산위에 신선이 살며 서로 날아 왕래함이 아침저녁으로 끊이 없었다
삼산 중에 일산은 부여 시가지의 동편에 있으며, 지금의 금성산을 추정하고 있으며
이들 삼산은 금성산을 중앙에 놓고 서쪽에 부산, 동쪽에 오산이 일정한 간격으로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고 한다
금성산은 백제 전역의 각 산성에 송수신을 담당하는 통수대를 세워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이 발생했을 때 군사 행동의 지시와 통제 및 총괄적 연락의 시작점이
되거나 종착점 역활을 했던 곳이다, 통수대(統帥臺)는 말 그대로 장군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백제문화의 고도(古都)에 어울리도록 목제를 사용한 산책로가 아주 잘 되어 있다
편안한 산길이라 지역 주민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금성산은 금남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완주의 축하라도 해주는 것처럼 철쭉이 만개하여 빵빠레를 울려준다
여기는 계백공원 금성산 산림공원으로 아래에 고려시대의 석불을 모신 조왕사가 있다
조왕사(朝王寺)의 부처님은 영험하시다고 구전되어 전해오고 있으며
산림공원조성사업 어워드 대상의 영예를 얻은 산림공원으로 부여 주민들은 행복하게 해준다
무노정(無老亭)은 맥길에서 좌측으로 약간 벗어나 있는데
<현판에 이런 "詩"가 적혀 았다> 무노정(無老亭)에 오르니 백마강(白馬江)이 굽이치고
눈앞에 궁남지(宮南池)에는 옛 백제무왕(百濟武王)의 한(恨)이 그리네
떠나가는 저 구름은 百濟의 恨인가! 지는 해에 산 비둘기 옛가지에 찾아 드네, <계미년 가을 부여군수 작>
계백공원 금성산과 남영공원을 잇는 생태이동통로인 계백문이 있는 인공터널이다
일제시대 때에 옛날의 보릿고개를 절개하여 신작로를 만들었고
이후로 아스팔트 큰길이 되어 금남정맥의 마루금이 훼손된 곳이였으나
몇년 전에 동물이동통로라는 美名으로 계백문을 세워 주민들이 찾는 산책로로 변한 것이다
생태이동통로에서 직진하면 방범용 CCTV표지판 방향으로 진행한다
아래쪽에 선답자의 시그널이 달려 있고, 금성산 산림공원은
옛 백제의 수도답게 많은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어 걸어가면서 즐길 수 있다
부여 시가지에 들어서면서 정상적인 정맥길은 없기에 잘 찾아가야 한다
활궁장에서 우측으로 표적판이 있는 가운데를 통과하게 되는데~
활궁장에 사람이 있는가를 확인하고 지나야 한다, 화살에 맞는 불상사가 없기를~
활궁장끝에서 우측에 홈마이홈 아트빌라 방향으로 내려선다
홈마이홈 아트빌라 우측벽을 지나서 도로에 내려서면
좌측 방향으로 큰 도로를 따라 <부여여고> 정문을 찾야가야 한다
좌측에 있는 홈마이홈 아트빌라를 우측으로 돌아 나온다
회림(會林)참치 앞쪽으로 쭈~욱 진행하게 되면~
부여도서관앞 도로를 가로질러 가면 끝부부분에 부여여고가 있다
회림참치에서 내려오면 4차선 도로를 건넌다
우측에 보이는 건물이 부여도서관이며~
도로를 건너 직진하면 끝머리에 부여여고가 있다
도로 끝머리 맞은편에 있는 건물이 부여여고의 전경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정문을 향해서 가야하며~
즉 다시말해서 좌측에 부여여고 우측에 부여도서관을 두고 진행한다
지금은 부여여고에서 통제를 하기 때문에 우측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다
평일에는 학생들이 수업을 하기에 우측으로 우회하여야 하고~
주말이나 방학동안에는 정문을 통해 갈 수 있지만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부여여고 정문을 지나면 곧바로 좌측으로 들어선다
좌측에 부여여고 담장을 두고 올라가게 되는데~
혹시나 길을 못 찾으면 부소산 가는 길을 물어보면 된다
마을 안쪽에 들어서면 조금은 햇갈릴 수 있으나
갈림길을 만나면 무조건 좌측 방향이며~
마을 골목길을 돌아가면 부여여고에서 올라온길과 만나게 된다
좌측길이 부여여고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곳이다
부여여고 우물터를 보지못한 것이 아쉬움이지만~
우물터는 옛 백제 왕궁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여여고에서 올라서면 부소산 산책로와 만난다>
여기서 좌측으로 500m 아래에 삼충사(三忠祠)가 있다, 부소산성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역사 유적지는
세명의 충신을 기리는 삼충사이다, 백제말기 의자왕 때 삼충사는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957년 지어 국가 성역화 사업으로 1981년 11월에 다디 지어졌다고 한다
넓은 산책로를 따라 1.5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삼충사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역사에서 패자인 사람들이 어떻게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길 수 있을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만은 아니다는 것을 느낀다, 패자지만 충신이기에 길이 남는다는 것을~
영일루(迎日樓)는 부여에 있는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이다
이곳에서 보면 저 멀리 닭벼슬 계룡산의 연천봉이 바라 보이는 곳으로
이곳에 영일대가 있어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 오르는 해를 맞이했던 곳이라 전한다
영일루의 현판 글씨는 부여출신 서예가 원곡 김기승 선생의 글씨로 迎과 樓자는 크게 하고
日자는 작게 썻다, 이것은 산봉우리 사이에 해가 떠 있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며~
누각의 "인빈출일"은 정향 조병호 선생의 작품으로 "삼가공경하면서 뜨는 해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군창지(軍倉址)는 "문화재자료 109호"로 부여읍 쌍북리 부소산성 동쪽 정상부에 있다>
이곳 땅속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됨으로 백제시대 군량미를 비축했던 창고터로 알려지게 되었다
1981년과 1982년 두차례에 걸쳐 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건물의
배치는 ㅁ자 모양으로 가운데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에 창고를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곳에 건물을 세워 백제시대부터 자리잡은 군창지를 다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좌측 산책로를 벗어나 우측으로 정맥길을 이어간다>
부소산성은 백제의 도읍지가 오랜동안 공주였으나 원대한 뜻을 펼치기 위해
수도를 부여로 옮겨와 부여읍 북쪽에 위치한 부소산 정상을
중심으로 쌓은 산성으로 백제의 도읍지인 "사비성"을 수호하는 중요한 곳이였다
부소산(扶蘇山,106m)은 낮은 산이지만 동쪽과 북쪽으로 두 봉우리로 나우어진 부여의 진산이다
능선을 흙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성이 부소산성으로 부소산이라는 산 이름은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 맨 처음 보이며, 그 이전에 무어라 불렀는지~
삼국사기 등의 역사에도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부소(扶蘇)의 뜻은
백제시대 언어로 소나무(松)의 뜻이 있어 부소산은 "솔뫼" 즉 소나무가 많은 산으로 보는 학설이다
<반월루(半月樓)는 백마강이 반달 모양으로 끼고 도는 부소산 남쪽 마루에 위치하고 있다>
반월루에 올라서면 부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고, 부소산성을 반월성으로 불리웠기 때문에
이름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백마강이 북에서 서남으로 다시 남동으로
부소산성을 반달 모양으로 휘감고 돌아 내려가는 형상으로 반월성, 반월루라는 이름으로 새겨진 듯하다
반월루에서 되돌아 나와 간이매점앞을 지나고, 이정목의 고란사나 낙화암 방향이다
봄날에 사람들은 마치 삼천궁녀의 애도의 물결처럼 술렁이었으며~
그래서 오늘 산행은 걷는 것만이 아니라 이런 역사의 뒤안길을 찾는 일이기도 하는 것이다
부소산(扶蘇山)은 백제의 숨결을 느끼고 바라보는 최고의 장소일 뿐 아니라
특히 태자(太子)골의 숲길은 옛 백제 왕자들의 산책로 였으며~
봄의 싱그러움과 여름이면 녹음, 가을이면 단풍, 겨울이면 눈꽃이 아름답다고 한다
산성안에는 백제시대 건물지 사자루를 비롯하여 많은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최근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어 우수상을 수상하여 많은 사람들로 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사자루는 우측으로 약간 벗어나 있다, 사자루(泗泚樓)가 있는 곳이 부소산 정상이다
사자루의 현판은 조선 고종황제의 다섯째 왕자인 의친왕 이강공의 글씨이고~
뒤편의 백마장강(白馬長江)은 이조말엽의 서화대가(書畵大家)인 해강(海岡)
김규진 선생의 명작으로 유명하다, 백마장강의 현판 글씨는 흘러가는 백마강의 강물처럼 유장하다
사자루(泗泚樓, 106m)는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宋月臺)가 있었던 곳이라 한다
백제 때는 이곳에 망대(望臺)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1919년 인천면의 문류였던 개산루(皆山樓)를 이곳에 옮겨 지으면서 사자루라 하였다
사자루를 되돌아 나와서 백화정과 고란사로 길을 잡는다
소풍 나온 초딩과 조우하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깔판을 손에 붙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세월에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백제의 700여년 왕조가 무너지던 날 왕의 궁녀들이 "차라리 자결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
이곳에 이르러 강물에 몸을 던져 원혼을 묻었다고 하여 낙화암(落花巖)이라 이름 지어졌다
그 당시 궁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해 붙여진 이름이며
1929년 궁녀들을 추모하기 위해 낙화암 바위의 꼭대기 지반위에 육각형의 백화정(百花亭)을 건립 하였다
백화정에서 바라본 백마강(白馬江)의 주변 경관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릉답다
낙락장송은 상천궁녀의 꽃같은 절개를 기리는 듯이 짓푸르고~
백화정 아래로 황포돛대 선착장이 보이면서 힘들게 걸어온 산객에 마음을 달래준다
고란사(皐蘭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6교구본사인 공주 마곡사의 말사이다
언제 창건되었는 알 수 없지만, 백제 아신와 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고~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백제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란사 법당건물은 조선 정조 21년(1797) 은산의 승각사에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절 이름은 뒷편 암벽에 자라고 있는 유명한 고란초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초석에 새겨진 연화 문양은 고려시대의 기법으로 추정하며, 사찰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절 뒷쪽의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있다고 한다
고란초의 발견은 옛날 원효대사가 사자강(錦江) 하류에서 강물을 마시고~
그 물맛으로 상류에 진란(眞蘭)과 고란이 있음을 알고 물맛을 따라 올라
이곳에서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는데, 현재는 진란은 없어지고 고란마져도 멸종위기에 있다
고란약수에 고란초를 띄워 마시면 한 잔 마실 때마다 삼 년식 젊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금실 좋은 노부부가 자식이 없어 세월을 한탄하고 있던 중 도사로 부터 고란사
바위에서 스며나오는 음양(陰陽) 약수가 효험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 약수를 너무 많이 마셔 갓난 아이가 되어버린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금남정맥 종주객들은 이 물을 마셔야 완주한다고 한다, 마음껏 드시고 완주의 기쁨을 누리시길~
일설에 의하면 고란사(皐蘭寺)는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한다
또한 궁중의 내불전(內佛殿) 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삼국시대에는 외국 사신들이 부소산성을 드나들던 유서깊은 포구였다고 전해진다
고란사 아래의 황포돛대 선착장이 금남정맥의 실질적인 종착지이다
선착장 좌측으로 조룡대(釣龍臺)가 눈앞에 있지만~
나룻배를 타고 가서 손이라도 당가보면서 끝을 맺어야 하겠지만 아쉽다
400여년의 전설속에 한(恨)많은 사연을 품에 안고 꿋꿋하게 백마강을 지키는 조룡대!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금남호남정맥을 거쳐 금남정맥이 주화산에서 분기하여
이곳 조룡대(釣龍臺)에서 여맥(餘脈)을 다한다 하여 금남정맥의 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 30대 무왕이 천룡(天龍)으로 현신(顯身)하여 백마강에 진입하는 당나라 군선 및 병력을
폭우로 동반한 뇌성벽력과 신묘한 요술로써 당나라의 병력을 모조리 백마강에
수장 시켰다고 한다, 이에 놀란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는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조룡대(釣龍臺)에서 용(龍)을 낚았다 해서 조룡대라 이름하고, 강이름도 백마강으로 불렀다고 한다
고란사 황포돛대 나룻터의 조룡대에서 실질적인 정맥길은 끝이난다
선착장에서 구드래나룻터로 걸어가는 길도 있지만~
유람선을 타고 백마강 물길을 따라 낙화암을 바라보는 것도 좋을 듯하였다
슬픈 사연을 안고 있는 백마강은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채 흘러간다
천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유구하면서도 내밀한 사연을 지닌 강물은 아무런 말이 없고~
황포돛대 유람선은 궁녀들의 원혼이 잠들어 있는 백마강을 유람하며 역사의 현장을 돌고 있다
백마강 강바람이 싸늘하여 등산복을 여미고 백마강을 따라 낙화암을 지나간다
유람선에서 허민의 노래 "백마강"이란 노래가 애절하게 흘러나온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꿈이 그립구나, 아~달빛어린 낙화암의 그늘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낙화암(落花巖)은 백제가 멸망하던 날 궁녀들이 절개와 충절을 지키기 위해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落花巖)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아직도 절벽 색깔이 붉은 색인데, 당시 백제의 여인들이 흘린 피로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전설이다
백화정 아래 절벽에 송시열이 쓴 "낙화암(落花巖)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낙화암의 본래 이름은 타사암(墮死巖)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떨어질(墮) 죽은(死) 바위(巖)은 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뜻이다
하지만 낙화심천, 꿈꾸는 백마강에도 낙화암으로 나오고~ 그냥 타사암일 뿐이라고 한다
금남정맥을 완주 후 유람선에서 부소산을 바라보고 옛 백제를 생각해본다
낙화암이면 어떻고 타사암이면 어떠하리~ 비슷한 말이 아닌가!
낙화암은 말이 없고, 백마강만 천여 년의 역사를 후세에 전하고 있을 뿐이다
금강은 전북 장수군 수분리 신무산 뜬봄샘에서 시작하여 군산 앞바다까지 흐르는 강이다
백마강은 백제의 제일 큰 강이라는 뜻으로 규아면 호암리 천정대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16Km의 금강을 일컫는데. 백제 사람들은 이 강을 사비강, 백마강이라 부른다
부여는 일제강정기 때 홍산현, 임천군, 석성현이 부여현에 합쳐져서 소부리 또는 사비로 불렀다
사비는 원래 새벽이라는 이 지역 토속 사투리였다고 하며, 지금의 이름인 부여(扶餘)도
"날이 부옇게 밝았다"라는 토막이 말로서 한문으로 옮기다보니 부여(扶餘)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백제의 찬란했던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백마강변 구드래나루터에 도착했다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린 금남정맥의 정기를 바탕으로 백마강을 잘 활용하여
후세들은 백마강 수상관광시대를 열고 백제의 부활과 함께 화려한 꽃을 피었으면 좋겠다
구드래나룻터 둔치에서 바라본 강(江) 건너 부산(浮山)의 전경이다
백마강 찾은 길손 고색창연하고 낙화암은 아득한 꿈이어라
사람들은 생각 있어 옛일 두고 상심하지만 무정한 저 강물은 아무말이 없구나
금남정맥의 시작점인 조약봉에서 시작하여 아름다운 호남알프스 구간인 운장산 암릉을 걸어 보았다
왕사봉갈림길에서 군산 앞바다로 이어지는 정맥 마루금을 접고 부여 부소산으로 전환하여
대둔산에서 가을 풍경을 만끽하면서 얼마나 즐거워 했었던가, 금남정맥의 꽃이라 불리는
계룡산의 비탐방지역인 천산에 올라설 때의 가슴 벅차고 뭉클했던 순간들이 그립기만 하다
거리는 짧았지만 명산들을 꿰차고 있어 정맥의 꽃이라 불리는 금남정맥을 조룡대에서 대미를 장식한다
부여 여행을 계획중이라면 백마강에서 돛단배를 타고 둘러 보심이 어떻하실까요?
배를 타고 낙화암과 고란사에 들려서 젊어진다는 물도 꼭 마셔 보시라요~
백제의 고도(古都) 역사 현장 백마강을 앞에 두고 금남정맥 산줄기와도 이별을 고한다
◎ 산행인원 : 울~몽실님과 함께 ◎ 산행시간 : 07 : 30 ~ 15 : 35 (08시간 05분) ◎ 날씨 : 흐림후,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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