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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간 9정맥종주▩/금북정맥(완주)

금북정맥 제2구간(베티고개-유량리고개) 종주산행

금북정맥 제2구간(베티고개 - 부소산 - 유량리고개)까지 종주산행

◎ 산행일시 : 2012년      06월       09일       (토요일)

◎ 산행위치 :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 천안시 유량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 산행구간 : 베티고개 - 서운산(瑞雲山) - 엽둔재(34번국도) - 만뢰지맥분기점 - 부소산(扶蘇山, 459.1m)

                      부소령 - 위례산(慰醴山, 523m) - 사리목고개 - 성거산(聖居山, 579.1m) - 만일고개

                      영인지맥분기점 - 유왕골고개 - 도라지고개 - 태조산(太祖산, 422m) - 아홉싸리고개 - 유량고개 

 

◎ 산행거리 : 베티고개개 ~ 2.6Km ~ 서운산정상 ~ 5.6Km ~ 만뢰지맥분기점 ~ 3.5Km ~ 위례산 ~ 2.2Km

                      우물목고개 ~ 2.3Km ~ 성거산 ~ 2.9Km ~ 태조산 정상 ~ 2.7Km ~ 유량리고개

                      도보거리   =   약 21.8Km           실제도보거리   =   약 22.5Km

 

◎ 산행인원 : 한울산악회와 함께     ◎ 산행시간 : 08 :15 ~ 16 : 55  (08시간 40분)      ◎ 날씨 : 흐림, 맑음

 

            ◐ 금강의 서북쪽을 지나는 산줄기의 금북정맥(金北正脈)종주 산행이란?

속리산에서 분기된 한남금북정맥이 경기도 안성땅 칠장산까지 와서  소임을 다하고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에 그 자리를 내주고

한남정맥은 인천, 김포벌을 누비며 강화 문수산에서 끝을 바다로 담그고 금북정맥은 남으로 내려가다가 청양 백월산에서

북진하여 가야산을 빗고 서산 은봉산에서 서쪽으로 돌려 끝을 안흥진 바닷가에 담그는 도상거리 약 250Km의 산줄기를 말한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곳이 없어지고, 자연을 훼손 한다면 갈곳이 없어진다

산악인은 산에 오르면 쓰레기와 추억의 사진외에는 가져오지 말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우리의 금수강산 발자국외에 아무것도 남기지말자

 

 

 

 

생거진천(生居鎭川) 백곡면이라는 커다란 돌비석 뒤로가 오늘 산행 들머리이며

배티고개(해발 370m)는 경기도 안성시와 충북 진천군의 도 경계를 이루면서

313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生居鎭川 死居龍仁이란 말은

용인땅의 형세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즉 살아서는 진천에서 살고 죽어서는 용인에서 산다는 말이다

 

 

 

 

배티고개(梨峙, 이티재)는 동네 어귀에 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란 말이 생겨났으며

현재 진천에서 배티를 거쳐 안성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말끔하게 포장돼 있는데도

차량들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한적하다 하지만 옛날에는 서쪽으로 안성,남쪽으로는

목천, 동쪽으로는 문경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져 박해 시대에는 교통의 중심지 역활을 했던 곳이라 한다

 

 

 

 

배티성지는 조선교구 최초의 신학교가 세워졌던 마을이고 한국 천주교회의 첫번째 신학생이자

두번째 사제였던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사목 중심지로

교리서인 "천주 가사"가 탄생된 곳이란다 "무명순교자 묘"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여 내려가 보았다, 십자가만 묘지앞에 나란히 있었는데 봉분도 희미하고 초라한 모습이다

 

 

 

 

배티성지는 천주교 박해시대에 생겨난 비밀교우촌으로,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50여 명의 순교자를 냈는데

그 가운데 29명은 교회 역사에 기록돼 있고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이름 없는 묘소들로 산재해 있다

 

 

 

순천 한울산악회 금북정맥 2구간 종주 기념사진

 

 

 

 

 

 

 

안성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삼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후기 들어 상업이 발달하고 시장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레 안성의 시장도 발달하여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였으며 특히 유기제품(녹그릇, 장내기)이 유명한 곳이다

유기제품이 양반가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면 산행길 또한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산객들에게는 명품길이다

 

 

 

 

우측에 석남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태종 7년(1407)에 자복사(資福寺)로 지정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화마의 잿더미로로 변하여 이후 이후 인조 27년(1649)부터 10여 년간

해원선사가 영산전을 중수하는 등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현재 영산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서운산(瑞雲山,547.7m) 정상은 실제로 삼각점이 있는 이곳이 정상이다

그렇다면 왜 우측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옮겨 놓았을까요?

안성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으로 산객들에 대한 배려가 아닌가 싶다

 

 

 

 

서운산(瑞雲山)은 안성시 서운면과 충북 진천군 백곡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 남쪽 아래에 고려 원종 6년(1265년)에 창건한 청룡사(靑龍寺)라는 절이 있는데

1364년 나옹화상이 중건할 때 청룡이 서운(瑞雲)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하여 산 이름은 서운산(瑞雲山) 절 이름은 청룡사(靑龍寺)라 하였다고 한다

 

 

 

 

서운산은 안성에 진산으로 안성시내(安城市內)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안성(安城)은 소박한 백성들의 숨결이 숨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으며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과 "바우덕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남사당패

총대장인 꼭두쇠를 일군 곳이 안성이요 또한 서민들의 인기스타 도둑놈

"장길산"의 무대가 안성이며, 홍명희의 역사소설 "임꺽정"의 사연이 깃든 곳이 안성(安城)이다

 

 

 

 

서운산 주변의 서운산성은 경기도 기념물 제 81호로 지정된 산성으로 북리산성으로도 불리며

금북정맥의 주봉인 서운산에서 뻗은 서쪽능선에서 서남방향으로 있는 해발 535m에서

460m지점까지 골짜기처럼 비탈진 경사면을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싼

반면식 토축산성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홍계남(洪季男)장군이 수축(修築)하여 방어전을 전개하였던 곳이다

 

 

 

 

서운산은 청룡사와 남사당패 바우덕이와는 인연이 깊은 곳으로

바우덕이(金岩德)은 여성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남사당패 총대장인 꼭두쇠였으며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패는 대원군으로부터 정3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이나

사용하는 옥관자를 하사 받았으니 천민으로서는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하였는데

아쉽게도 꽃다운 나이 스무세살에 폐병으로 靑龍寺에서 요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청용사(靑龍寺) 갈림길에서는 직진방향이며

청용사는 1265년(고려 원종6)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寺)가

창건한 절로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菴)이라 하였으나

1364년(공민왕 13)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청용사(靑龍寺) 하면" 바우덕이 이야기를 빼 놓을 수가 없다

바우덕이의 본명은 김암덕(金岩德)으로

이름자에 나오는 岩이 바우임으로 [바우 + 德이 = 바우덕이]로 불리어진 듯하다

 

 

 

 

지도상 395.4m봉을 오르기전에 안부에서 우측으로 청용사 가는 갈림길이다

바우덕이(金岩德)는 조선시대 안성에서 소작농의 딸로 출생하여 5세 때 청룡사 안성남사당에 입단하여

15세때 조선시대 유일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가 되어 전국 장터를 다니면서 풍물놀이는 물론이고

탈놀이, 창(노래), 곡예 등 최고의 예술단으로 요즘 같으면 걸 그룹의 "원더걸스" 정도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

 

 

 

 

지도상 395.4m봉에는 나무로 연결해 놓은 쉼터가 있으며

건너편으로 청룡저수지가 보이고 뒷쪽으로 가야할 부소산이 조망된다

바우덕이는 그 화려한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청룡저수지 주변을 산책하다가 꽃다운 나이 23살에 처녀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엽돈재는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백제가 국경지역이어서 군대가 항시 주둔했던 곳이였다

고개가 험준한 곳이지만 교통의 요충지로 임진왜란 등 많은 전란시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안성 사람으로는 홍계남(洪季男)이

의병 수천명을 모군(慕軍)하여 여기에 주둔하면서 왜군과 한바탕 싸워서 이긴 곳이기도 하다

 

 

 

 

엽둔재(葉屯峙)는 고개이름의 유래가 확실한것은 없지만

엽돈재를 다른 이름으로 엽전재(葉錢峙) 엽둔재, 엽둔티, 율둔티 등으로도 불렀으며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옛날 장을 보려고 이 재를 넘나드는 사람이 많았는데

숲이 워낙 깊어 장꾼들을 노리는 도둑이 많았던 관계로

엽전을 가지고 가던 사람은 모두 빼았겼다고 해서 엽전재(葉錢峙)가 엽돈재로 변한것 같다

 

 

 

 

엽돈재에는 인천항 평균수면을 기준으로 고도를 측량해 놓은 수준점이 있으며

이곳은 경기도, 충청북도, 충청남도가 만나는 경계지점으로

이곳에서 부터는 충청북도와는 이별을 하고 충청남도로 들어가면서 안흥진으로 이어진다

 

 

 

 

만뢰지맥(萬賴支脈)은 만뢰산을 거쳐 장교현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솟구쳐 덕유산(412m), 환희산

목령산을 일으키고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상봉산(196m)과 국사봉(171m) 응봉산(175m)을

거친 후 미호천과 병천천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46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부소산(扶蘇山, 459m)은 부소는 솔(松)의 뜻이며

옛 직산현의 동쪽과 목천현의 북쪽 경계를 이루던 산이며

백제시조 온조왕이 마한 목지국의 진왕으로부터

동북 100리 땅을 봉토받아 백제 첫도읍지<하남 위례성>을 세운 곳으로 전해진다

 

 

 

 

부소령은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에서 북면 운용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57번 지방도로가 지난다

부소산과 위례산성을 이어주며 扶蘇嶺, 扶蘇峙, 扶所門峙 등으로 불리워졌는데

부수문이고개라고도 불리우고 있으며 백제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도읍하였을 때

이곳에 문을 세웠다는데서 부소문치, 부소문이라 불리운것 같으며 또한 소나무산 고개라고도 불린다

 

 

 

 

부소령(扶蘇嶺) 표시석 좌측에 새겨진 글귀에는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편이다

北帶漢水(북대한수 : 북으로 한수를 띠고) 東據高嶽(동거고악 : 동으로 높은 산 의하며)

南望沃澤(남망옥택 : 남으로 옥택을 바라보고) 西阻大海(서조대해 : 서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天險地利(천험지리 : 땅이 험준하고 이로움 많으니) 難得之勢(난득지세 : 가히 얻기 어려운 형세라)

 

 

 

 

위례산 오름길은 경운기도 다닐 수 있는 수레길이며

중간 중간에 쉼터가 마련되어 있어

뒷동산 마실가는 기분으로 코노래 부르며 편안한 오름길이다

 

 

 

 

위례산성과 입장읍으로 가는 갈림길 쉼터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다

이곳에서 위례산성은 좌측으로 90도 꺾어 진행하며

우측길은 거봉포도로 유명한 천안시 입장읍으로 가는 길이 뚜렸하게 보인다

 

 

 

 

돌탑이 있는 이 봉우리가 어쩌면 위례산 정상일지 모른다

날씨가 덥고 그늘이 없어 눈팅만 하고

그냥 스쳐 지나가지만 곳곳에 성터를 보수하고 있는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백제의 첫 도읍지가 위례성이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곳으로 따라서 이곳은 백성들을 전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산성으로 백제의 시조 온조가 만주지방의 고구려를 떠나 이곳 직산까지 와서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고 개국한 곳이 현재의 직산면과 성환읍, 입장면, 성거읍 지방이었고

위례산성은 난시소용의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으로 보이며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아도 1,690척의

성과 우물이 하나 있고 또 온조왕 13년(BC 5)에 이곳으로 경기도 광주 지방으로 천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위례산(慰醴山, 523m)은 백제시대 하남위례성을 상징하는 진산(鎭山)이며

숭산(崇山)으로 검은산, 신산이라고도 불리워 지기도 했으며

전설에 의하면 백제군이 고구려에게 패하고 울었다 하여 위례산(慰禮山)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산 정상 부근에는 용샘(용정, 龍井)이 아직도 남아 있고 또한 문받침돌로 여겨지는 큰돌 반쪽이 남아 있다

백제의 임금은 용왕의 아들이라 하여 서해바다와 한강, 금강을 이 용샘을 통하여

용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자유롭게 들락거렸다고 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장수왕의 한성공격으로

치열하게 싸울 때도 용샘을 통하여 서해바다~ 한강으로 들락거렸고

도읍을 공주 금강유역으로 옮긴 후에도 고구려, 신라의 침입으로 위례성 일대가

삼국의 각축장이었으며 백제왕은 금강~용샘으로 들락거리며 전투를 지휘하고 군사들을 독려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도상 463m봉으로 마루금은 우측으로 90도 꺾어 내려선다

부소산 아래 깊은골(深谷)엔 온조대왕이 맨 처음 이곳에서 머물며 정사를 살폈다 하였고

북면 군단이엔 백제시대 군대가 주둔하였던 곳이었고

곡간리(曲干)는 군량미를 이곳에 곳간처럼 저장하였다고 하여 지어진 지명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우물목고개는 사리목 마을과 남안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우물목을 넘어가는 고개 근처에 우물이 있었다 하여 우물목이라 불리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으며 고갯마루에는 돌탑이 쌓여 있고

오색천을 나무에 휘감아 놓은 것을 보면 지금도 누군가가 祭를 올리는 성황당으로 보여진다

 

 

 

 

사리목고개는 고개가 험하여 여러 사리를 이루웠다하여 사리목 고개라 부르며

저아래 호당리에서 올라오는 길과 사리목마을에서 올라오는

시멘트 도로가 합쳐지는 곳으로 이곳에서 아스팔트 길을 따라 성지산성지 방향으로 올라간다

 

 

 

 

병인박해 당시 성거산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다 순교한 분들을 모신 줄무덤 및 신앙 공동체였던

교우촌 유적지이며, 천안 성거산 자락은 19세기 초부터 천주교 박해 이후까지

천주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영휘했던 삶의 터전으로 특히 이곳 소화골 교우촌은

칼래 신부의 충청, 경상, 경기, 일부를 관할했던 사목할동 중심지이고 천주교 박해시 생활유적 기록이 보존된 곳이다

 

 

 

 

오늘 산행중 가장 높은 봉우리인 성거산(聖居山, 579m)은

공군방공포 부대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어

정상에는 오를 수가 없어 부대 정문에서 좌측으로 우회를 해야한다

 

 

 

 

정맥의 중심에 부대가 있기 때문에 좌측편 철망 울타리를 따라 후문쪽까지 진행을 합니다

좌측으로 진행을 하다보면 은석산 갈림길이 나오는데

영조 때 암행어사 박문수가 죽자 그의 묘소를 지금의 독립기념관 자리에 정하였는데

이 때 어느 유명한 지관이 2~3백년 후에는 나라에서 요긴하게 쓸 땅이므로 그때가면 이장을 해야되니

이곳에서 십여리 동쪽에 묘를 쓰라고 권하여 지금의 북면에 위치한 은석산에 묘소를 정하였다고 한다

 

 

 

 

성거산 정상은 공군반공포 8352부대가 차지하고 있는 바람에 성거산 정상 표지석을

건너편 봉우리에 조금 떨어진 곳에 정상석을 세워 놓았다, 국가 안보를 위해

성거산을 차지한 것은 백번 이해하나 철망울타리를 우회하는 정맥길을 정비를 하여 주웠으면 하는 바램이다

 

 

 

 

성거산(聖居山, 579m)은 여지승람(與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거쳐 남정할 때

직산 수헐원(시름세)을 지나다 동쪽을 바라보니 산 위에 오색의 구름이 떠 있어

신이 계시는 산이라 하고 신제를 지냈기 때문에 산이름을 성거산이라 하게 되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太祖), 세종(世宗)이 온양 온천에 갈 때 지체하면서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도 한다

 

 

 

 

만일(晩日)고개는 만일사란 절 이 있어 만일고개라 부르게 되었으며

천흥리에서 목천면 산방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가는 길에 돌탑에 돌맹이 하나 올려 놓고 두손 모아 안전 산행을 기원해본다

 

 

 

 

걸마고개는 삼벵이(메일골)에서 화전민들이 숯이나 화목을 팔러 갈 때 넘나들던 고갯마루라 하며

예전에 칡이 많이 나서 갈(칡葛)뫼가 갈마고개가 되고 걸마고개로 변음이 되었으며

삼벵이는 성거산 아주 깊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걸마고개 이정목의 방향 표시가 "계성군의 묘" "숙의 하씨 묘"를 가르키고 있다, 숙의하씨는 

영의정"하연"의 딸로 부인을 열둘이나 두었다는 조선9대 임금 성종의 후궁중 한명이고 계성군은 숙의 하씨 소생이다

 

계성군(桂城君)은 조선 성종의 2남이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성풍이 거만하고 포악했으며

시중잡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나쁜짓을 일삼던 망난이었지만

연산군이 그를 총애하여 벌을 주지 않했으며 26세 때 세상을 떠나 자식이 없고

시흥군 신림리에서 1971년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하며 왕족의 무덤이지만 평민의 무덤과 다를것이 없다고 한다

 

숙의(淑儀)하씨는 조선시대에 임금의 후궁에게 내리던 종2품 내명부의 품계로 소용(昭容)의 위

소의(昭儀)의 아래에 해당하는 직위이며 淑儀라면 무술이를 거느릴 수 있을 정도로 재정권을 가진 후궁이라고 한다

 

 

 

상명대학교 갈림길 이곳에서 마루금은 태조산 방향인 좌측방향으로 진행한다

 

 

 

 

 

 

유왕골(덕전3리)은 점말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백제시조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봄, 가을이 되면 이곳에 머물면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 운주(현 홍성)지방 성을 취하여

목주(현 천안시 동남부지역 일대)를 친히 다스릴 때 태조산에 진을 치고

군량은 유량동에 두고 왕은 이 곳에서 천하를 살피고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곳이 바로 유왕골이라고 한다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동양최대의 아미타불좌상이 있는 각원사(覺願寺)는 천안시 동남구 태조산 기슭에

제일교포 각열거사(覺列居士) 김영조씨의 시주로 1977년 5월에 세워졌으며

거대한 청동아미타불상과 언덕에 있는 03개의 계단 등 각원사는 경주 불국사(佛國寺)이래  최대 사찰이라 한다

 

 

 

 

천안시는 옛날 우리나라 삼남대로의 분기점으로 유서깊은 천안삼거리가 있는 곳으로

서울에서 내려오는 대로로 천안에 이르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한길은 병천을 거쳐 청주로 들어가 문경새재를 넘어 상주를 통해

영동, 김천을 지나대구, 경주, 지금의 부산(동래)으로 통하는 길이요 

또 한길은 공주을 거쳐 전주, 광주, 순천, 여수 등지로 통하는 대로로 선비들이 쉬어가는 분기점이였다

 

 

 

 

태조산 가는길은 소나무가 울창하여 삼림욕 및 산책로로 사용하기 좋은 곳이며

천안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장소로 곳곳에 산책을 즐기고 있었으며

이정표가 있어 길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었으며 천안(天安)이란 이름처럼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길이 아닌가 싶었다

 

 

 

 

이곳 도라지고개(조라지고개)는 유량동에서 천안군 목천면 덕전리 유왕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엣날에는 꼬불 꼬불 굽어진 고개길이 길고 험하여 넘어가는 도중에 졸음이 온다고 하여

조라지 고개라 하였는데 지금이 도라지고개로 불리우고 있으며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 목천지방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천안에 이르렀던 대로 였으나 지금은 한적한 오솔길이다

 

 

 

 

교보생명 연수원 산책로 울타리를 넘어서 좌측으로 올라가면 태조산 정상이 나온다

성거산부터 태조산까지의 영역은 고려태조가 이곳이 신령한 산이라고 하여

고려태조 왕건과 관련이 깊은 산으로  옛날에는 군사를 훌련하였던 곳이기도

하였다고 전혀져 오고 있지만 지금은 소나무숲길이 조성이 잘되어 있어 하늘아래 명품길로 변했다

 

 

 

 

태조산(太祖山, 421.5m)은 고려건국 이전에는 동서도솔로 불리었는데  서기 930년

고려 태조왕건이천안의 진산인 이곳 태조산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고

오룡쟁주지세(五龍爭珠地勢)로 군사적 요충지임을판단하고

천안에 천안도독부를 두고 민호(民戶)와 군사를 상주케 함으로써 천안과 태조산의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도상 365m봉인 교보생명 울타리를 넘어서면 전망좋은 봉우리의 이정목을 만나게 되는데

"하늘아래 편안한 도시" 천안(天安)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전망좋은 봉우리를 지나면서 부터는 시그널이 없어 홀로가는 산객은 공부를 하고 가야하는 주의 구간이다

 

 

 

 

아홉사리고개(九曲峙)는유량동에서 목천면 삼방리(三方里)로 넘어가는 고개로

크게 아홉번 구비져 온다고해서 아홉사리고개라고 부르며

예전에는 목천지방 사람들이 천안에 오려면 이 고개를 넘나 들었으며 국수 새끼를 사리듯 꼬부라진 고개라 한다

 

 

 

 

동물이동통로가 있는 유량리고개가 오늘 산행 날머리이다

유량동은 고려태조 왕건이936년후백제의 신검(神劍), 양검(良劍)을 정벌하기 위하여

천안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군량을 쌓아 두었던 곳이라 하여 유량골(유량동)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유량동과 지산리를 연결하는 2차선 포장도로가 동물이동통로가 생기면서 터널 형식으로

고갯길을 연결해 놓았으며  목천읍 지산리 방향으로 10m정도 내려가면

좌측으로 챠량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한 구간을 끊어서 진행가기 좋은 장소로 안성 맞춤이다

 

 

 

 

유량동고개에서 목천읍이 보이고  좌측으로 독립기념관을 품고 있는 흑성산이 우뚝 솟아 있고

고갯마루 우측으로 남양유업공장이 넓게 자리하고 있었으며 

오늘은 天安이란 지명과 같이 하늘아래 살기 좋은 고을길을 걸어오면서 행복이 가득한 산행이었다

 

◎ 산행인원 : 한울산악회와 함께     ◎ 산행시간 : 08 :15 ~ 16 : 55  (08시간 40분)      ◎ 날씨 : 흐림, 맑음